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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독후감

[독후감] 이야기의 탄생 - 윌 스토

by 이윤도 2021. 10. 2.

<이야기의 탄생> 윌 스토

저자 소개 : 윌 스토
  기자이자 소설가이다. 분쟁지역인 남수단 공화국에서부터 호주에 이르기까지 어느 곳이든 가리지 않고 취재해 왔으며, 《가디언》 《선데이 타임스》 《뉴요커》 《뉴욕 타임스》에 글을 실었다. 『셀피(Selfie) 』 『이단자들(The Heretics)』을 비롯한 베스트셀러를 출간했으며, 《선데이 타임스》 장기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는 등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스토리텔링을 과학적으로 접근해 분석한 강의로 명성을 얻으며 세계 각지의 스토리텔링 워크숍에 초빙되기도 했다. 현재 런던에 거주하며 저널리즘과 스토리텔링 강의를 하고 있다.


  처음 책을 집어들 때는 별 기대를 하지 않았었다. 뇌과학적 근거에 기반하여 문학적 글쓰기에 대한 조언을 모은 책 정도로 생각했다. 언젠가 소설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에 가벼운 마음으로 집어들었었다. 하지만 단순한 조언을 모은 작법서가 아니라 이야기를 읽는 주체인 인간에 대한 분석이 주된 내용이었고, 기대 이상으로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뇌과학적, 심리학적 분석을 통해 우리가 어떤 이야기에 관심을 갖는지 이해함으로써 어떤 스토리텔링을 해야할지 깨닫게 만들어주는 책이었다.

  독서 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인간의 결함이라는 개념이다. 신념의 일종이라고도 표현되었다. 사람이 주변 환경을 통제하기위해 갖고있는 일종의 개인적 믿음이며, '그는 누구인가?'라는 극적 질문에 대한 답이다. 인물의 말과 행동을 통해 우리는 그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가며 그의 '결함'을 알게된다.

  인물이 가지고 있는 결함은 곧 그의 세계와 같다. 이야기에서 인물은 여러 사건사고를 통해 개인이 가지고 있던 이런 결함을 바탕으로 한 믿음을 시험당한다. 그 과정 끝에 누군가는 자신의 믿음을 바꾸어서 성장하고, 누군가는 믿음을 고수한 채 무너진다. 이를 변화시킨다는 것은 자신의 세계를 바꾼다는 소리다.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이러한 내용을 보다보니, 소설 <데미안>에 나오는 한 구절이 떠올랐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데미안> 中


  책을 읽기 전과 후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이야기의 인물들에 집중하게되었다는 점이다. 대표적으로, 허지웅 작가가 영화 <다이하드>를 표현한 문장이 생각났다. <다이하드>는 '제때 아내에게 미안하다고 말하지 못했던 남편이 하루종일 죽을만큼 고생을 한 이후에 그 하루의 끝에 아내를 만나 화해하는 이야기'라고 말했던 허지웅 작가의 말이 더욱 깊이 다가왔다. 총알이 빗발치고 차량이 폭발하는 장면이 중요한게 아니었다. 인물을 보게되자, 전혀 다른 영화가 된 듯 느껴졌다. 인물을 중심으로 보면, 액션 영화에서조차 액션은 부차적인 것일 뿐이었다. 이 책을 통해 여러 이야기 컨텐츠들의 인물들을 보는 눈이 조금이나마 떠진 듯 느껴졌다.

  책의 내용을 따라가며 여러 영화나 소설 속 인물의 결함을 살피다보면 나의 결함은 무엇인지 자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이야기의 구조를 분석하는 글을 읽고 있노라면 인간의 성장 과정이 떠오르게 된다. 단순한 작법서라 생각하고 읽던 책에서 시작해서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문학적 글쓰기에 관심있는 사람뿐만이 아니라, 사람을 조금 더 이해해보고 싶은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은 이유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화와 드라마를 즐기고 만화를 볼텐데 이 책을 읽고나면 그러한 컨텐츠들 속의 인물을 새로 보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컨텐츠를 더 깊이 즐기는 것을 넘어서, 자신을 깊게 살펴보고 돌이켜보는 기회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공감하는 추천사들은 아래와 같다.

이 책을 읽으면 훨씬 좋은 작가를 넘어서 훨씬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  - 홀리 번, <Am I Normal Yet?> 저자
단순히 이야기를 만드는 방법에 관한 책이 아니다. 인간으로 살아남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하는 책이다. - 팀 로트, <How to be invisible> 저자

어디에나 이야기가 있다. 이야기가 곧 우리다.
많은 이야기가 예기치 못한 변화의 순간에 시작된다. 그리고 그 순간을 통해 이야기는 이어진다.
작가는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고 독자에게 그 세계에 관해 모든 것을 말해주지 않으면서 정보에 대한 갈증을 자극한다.
신경과학계의 최신 연구 결과에서는 오싹한 질문이 제기된다. 우리의 감각기관이 그토록 제한적이라면 두개골 밖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어떻게 알까? 불안하게도 확실히는 모른다.
뇌는 외부 세계에서 어떤 형태로든 정보를 받아서 신경계 모형으로 변환한다. 책의 글자를 눈으로 훑으면 글자에 내포된 정보가 전기 파장으로 변환되고, 뇌가 그 파장을 받아 글자들이 제공하는 정보의 모형을 생성한다. 책에 적힌 단어들이 경첩 하나로 매달린 헛간 문을 묘사하면 독자의 뇌에서도 경첩 하나로 매달린 헛간 문 모형을 생성하는 것이다. 독자는 머릿속에서 그 장면을 ‘본다.’
작가는 독자의 마음에 상영되는 영화를 만들어주는 셈이므로 영화와 같은 순서로 단어를 배치하면서 독자의 머릿속 카메라가 문장의 각 요소를 발견하는 과정을 상상해야 한다.
뇌에서 자동으로 모형을 생성하는 성향은 판타지와 SF소설 작가들이 가장 큰 혜택을 보는 기능이다. 어느 행성이나 고대의 전쟁이나 복잡하고 정교한 기술의 이름만 언급해도 신경계는 마치 그런 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자극받는다.
인간 행동은 중요하고 복잡하다는 점에서 끊임없이 호기심을 가져야 한다. 작가들은 이런 기제와 호기심을 활용하는데, 작가들의 이야기는 한 인물의 행동 뒤에 숨겨진 흥미진진한 이유를 깊이 파고드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의 대상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이 연상시키는 모든 것을 함께 본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함께 느낀다.
오웰이 글쓰기에 관해 했던 말은 절대적으로 옳다. “참신한 은유는 시각적 이미지를 환기해서 생각을 지원한다.” 그는 1946년에 이렇게 말하고는, “닳고 닳은 은유는 환기의 힘이 다 빠져서 사람들에게 스스로 문구를 떠올리는 수고를 덜어주는 기능만 할 뿐이므로 과도하게 사용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지적했다.
인과관계는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의 근간이며 뇌는 원인과 결과를 연결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자동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상업적 스토리텔링과 문학적 스토리텔링의 본질적인 차이는 인과관계를 어떻게 활용하는지에 있다. 대중적 이야기에서는 변화가 빠르고 선명하고 이해하기 쉬운 반면, 문학성이 높은 작품에서는 변화가 느리고 모호하며 독자에게 많은 생각을 요구하므로 독자 스스로 사건의 연관성을 고민하고 해독해야 한다.
인과관계는 말로 표현하기보다는 보여줘야 하고, 설명하기보다는 암시해야 한다. 아니면 이야기에 대한 호기심이 식어버리고 독자나 관객은 지루해진다.
좋은 이야기는 인간 조건을 탐구한다. 극의 표면에서 벌어지는 사건보다 인물에 더 집중한다. 낯선 마음으로 떠나게 되는 흥미진진한 여행이다. 첫 페이지에 등장하는 인물은 결코 완벽하지 않다. 우리가 그 인물에게 호기심을 느끼고 극적인 싸움을 제공하는 이유는 그가 성공하고 매력적인 미소를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가진 결함 때문이다.
남들은 다 ‘편견’에 치우치고 우리만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처럼 느낀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순진한 사실주의’라고 부른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현실이 선명하고 명백하고 자명해 보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현실을 다르게 보라고 요구하는 사람들이 어리석거나 거짓말을 하거나 도덕적으로 무책임한 사람들이 된다.
인간처럼 고도로 사회화되고 가축화된 존재에게는 타인의 인과관계, 곧 남들이 하는 행동의 ‘이유’를 아는 것만큼 매력적인 경험도 드물다. 하지만 이야기는 그 이상을 제공한다. 이야기는 우리가 머릿속의 저장고 안에 갇힌 채로, 영원히 고독한 환각의 우주에 갇힌 채로 우리와 가장 가까이 있지만 끝내 도망칠 수 없는 그 세계로 들어갈 수 있게 해주는 문이다. 이야기는 환각 속의 환각인 셈이다.
우리가 지키려고 싸우는 신념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정체성과 가치관과 통제 이론을 이루는 믿음이고, 따라서 이 신념에 대한 공격은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 자체를 공격하는 셈이 된다. 이야기에서는 이런 신념과 이런 공격이 가장 중요한 스토리를 이끌어낸다.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감각은 주로 기억에 의존하지만 사실 기억은 신뢰할 만하지 않다.
심리적으로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 자신을 영웅으로 생각한다. 도덕적 우월성은 사실 ‘유난히 강력하고 보편적인 긍정적 착각의 한 형태’다.
드문 예이기는 해도 이시구로의 소설에서 집사 스티븐스가 결국 감정 절제에 대한 확신을 허물듯이 사람들은 자신의 정체성이 구축된 근간의 신념을 바꿀 수 있다. 우리는 이런 용감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신화화한다.
이 사람은 누구인가? 모든 이야기가 던지는 질문이다.
이야기는 결국 결함 있는 자아가 치유의 기회를 얻는 과정에 관한 것이다.
영웅은 우리의 도덕적 분노를 충족시켜주며 도덕적 분노는 스토리텔링의 원시적인 혈액과도 같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이런 원시적인 인식이 있다. 우리는 부족의 이야기로 사고한다. 이것이 우리의 원죄다. 우리 부족의 지위가 다른 부족에 위협받는다고 느낄 때마다 이런 고약한 신경망이 발화하고, 그 순간 우리는 잠재의식 차원에서 다시 선사시대의 숲이나 초원으로 돌아가며 스토리텔링 뇌는 전투 태세에 돌입한다. 반대편 집단에는 오로지 이기적인 동기만 부여한다. 독기 품은 변호사가 되어 상대의 가장 센 주장만 듣고 상대가 하려는 말을 곡해하거나 생략한다. 상대의 가장 수준 낮은 구성원이 저지른 끔찍한 범죄를 빌미로 그들 모두를 붓으로 뭉개듯 동일시해버리고 일개 개인만 보고 다른 모두의 깊이와 다양성은 지워버린다.12 한 개인을 형체만 그려둔 다음 부족을 그런 형체의 무리로 만든다. 자기 부족 안에서 아낌없이 나눠주던 공감과 인류애와 인내심 있는 이해를 이런 형체에는 나눠주지 않는다. 그사이 우리는 마치 흥미진진한 이야기의 도덕적인 주인공이 된 것처럼 긍정적인 기분을 느끼는 것이다.
좋은 스토리텔링은 좋은 심리학과 좋은 신경과학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행동을 깊이 탐색한다. 문학적 스토리텔링은 표면에 드러난 행위보다는 인물들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에 관한 폭넓은 단서를 배치하는 작업이다.
모호한 생각은 모호한 인물만 낳는다.
우리는 날마다 이런 식으로 살아간다. 우리가 인간 환경에서 보는 현실은 과거의 산물이자 자기만의 고유한 상처의 산물일 때가 많다. 우리는 뇌에서 무시하는 대상은 보지 못한다.
우리가 누구이고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알아내려 한다는 것은 이야기가 던지는 도전을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우리는 변화할 만큼 용감한가? 이야기의 플롯이, 그리고 인생이 우리에게 묻는다.
성공적인 이야기와 성공한 삶의 근간에는 주변의 혼돈에 수동적으로 반응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있다.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낙관주의와 운명이라는 착각으로 삶의 플롯을 밀고 나간다.
인간은 이야기를 만들도록 태어났다. 힘들지만 의미 있는 목표를 추구하면서 번창한다. 뇌의 보상 기제는 목표를 달성하는 순간이 아니라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상승한다. 무언가를 추구하는 과정들이 쌓여서 인생이 되고 플롯을 만드는 것이다. 추구할 목표나 적어도 목표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감각이 없다면 실망과 우울과 절망만 남는다. 죽느니만 못한 삶이다.
신경과학자 보 로토Beau Lotto 교수는 “적극적인 태도는 중요할 뿐 아니라 신경학적으로 필요하다”라고 말한다. 이것이 우리가 성장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야기 사건은 인물의 정체성의 핵심을 건드리도록 설계되어 있으므로 인물이 바꿔야 하는 부분은 그가 가장 바꾸기 힘든 부분이 된다. 인물이 잠재의식 차원에서 결함 있는 세계 모형을 완전히 바꾸려면 거의 초자연적인 힘과 용기를 끌어내야 한다.
이야기는 이렇게 공감대를 형성한다. 인간에게 자연스럽고 유혹적인 집단 혐오에 대한 치유책으로 이보다 더 나은 방법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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