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독서와 독후감

[독후감] 불안사회 - 에른스트 디터 란터만

by 이윤도 2021. 7. 11.
<불안사회> - 에른스트 디터 란터만

저자 소개
저 : 에른스트 디터 란터만 (Ernst-Dieter Lantermann)
현대 독일의 지성이자 독보적 사회학자. 1945년 오버하우젠에서 태어났다. 독일 본 대학교에서 사회학, 심리학, 철학을 공부했다. 라이프치히 대학교, 만하임 대학교, 베른 대학교, 포츠담 대학교의 초빙교수로 재임했고, 독일 카젤 대학교 사회심리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20여 년간 불확실성 극복 전략에 천착하며 인간과 주변 환경, 생각과 느낌의 관계를 연구하고 있다. 하인츠 부데(Heinz Bude)와 더불어 사회적 소외의 배경과 문제를 연구하는 뛰어난 사회학자로 손꼽힌다. 지은 책으로는 『연대와 거주에 관한 현장 연구Solidaritaaat und Wohnen: Eine Feldstudie』『회화의 변화와 상상력: 예술 심리학Bildwechsel und Einbildung: Eine Psychologie der Kunst』『상호작용: 사람, 상황, 행동 Interaktionen: Person, Situation und Handlung』 등이 있다.

역 : 이덕임
동아대학교 철학과와 인도 뿌나대학교 인도철학 대학원을 졸업했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독일어 과정을 수료했으며, 현재 바른번역 소속 번역가로 일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노력중독》, 《비만의 역설》, 《구글의 미래》, 《시간의 탄생》, 《라이트 박사의 마흔 이후의 피트니스》, 《어느 애주가의 고백》, 《내 감정이 버거운 나에게》 등이 있다.


예전에 읽었던 '혐오사회'에 이어서, 근래 사회를 표현하는 제목에 이끌려 읽어보았다. 불안, 혐오, 경쟁과 차별 등 요즘 사회를 생각하면 이런 부정적인 뉘앙스의 단어들이 떠오르는 것은 내가 염세적이라서 그런 것일까? 기술은 발전하고 경제는 성장했음을 객관적 지표로 확인할 수 있는데 사회적 정서가 팍팍해진 감이 있는 듯도 하다.


책은 현대 사회의 환경에 따른 불안감이 어떻게 사람들을 급진주의와 광신주의로 빠지게 하는지 설명한다. 서로 무관해보이는 채식주의자, 피트니스 마니아와 외국인 혐오자 등이 급진주의적 면모를 보이며 광신주의로 변하는 이유와 그 과정에서 보이는 공통점을 살펴본다. 불확실성과 불안으로 상처 받는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이 광신주의적 변화 과정을 통해 어떻게 확실성과 확신을 되찾고 자기가치감을 회복하는지 분석한 내용이 담겨있었다. 예전에 읽었던 <혐오사회>에서 느꼈던 것과 마찬가지로, 독일 사회를 기반으로 한 저서임에도 괴리감이 없었다.


저자의 분석을 보며 우리 사회에서 보았던 모습이나 개인적으로 목격했던 사례들이 떠올랐다. 대표적으로는 성별 갈등과 정치 갈등이 있다. 성별 자체에 기반을 둔 혐오 문제나 어느 편인지 확인해가며 무작정 찬양하거나 비난하는 정치 문제에 관련된 댓글이 인터넷에서 꽤나 큰 비중을 차지할 것 같다. 그 외에도 내가 보았던 광신주의적 태도로는 운동마니아가 있다. sns를 통해 자신이 운동하는 모습을 올리며 '나는 나시티 입고 땀을 흘리는 돼지가 혐오스럽다..'는 등의 글을 자랑인 듯이 올리는 모습을 보았었는데 충격이었다. 그 사람에겐 외적인 근육의 모습과 운동 수행능력이 곧 인간 가치 판단의 기준이 되어버릴 정도였던 것이다.


그리고 책을 읽으며 떠오른 말이 있다. '극과 극은 통한다'라고 했던가. 극단으로 치달은 사람들은 입장이 반대여도 똑같은 사람들이라 느껴질 때가 종종 있다. 책을 읽으며 이러한 이유가 그들이 공통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겠다고 생각했다.


적고 보니 내가 너무 염세적으로 쓴 것 같긴하다. 하지만 저자의 마지막 말대로, 우리에겐 희망이 있다. 저자의 동네도 그렇지만 우리 사회도 그렇다. 인터넷에는 우리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조장하는 열성적인 극단주의자들이 많다. 하지만 현실로 눈을 돌려보면 따뜻한 이웃들이 있다. 내가 겪은 것만 해도 서울 지하철에서 어머니가 혼절했을 때 신고와 처치를 도와주고 끝까지 옆을 지켜준 이름 모를 시민분이 계셨다. 인터넷의 익명성에 숨은 극단주의자들이 훼손하려는 사회적 연대감을 가장 강력히 보호하는 것은, 모르는 사람이 보여준 배려나 호의 등이 아닐까 싶다.


이 책은 급진주의와 광신주의에 빠져드는 현상에 대응하여 건강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 제시는 없다. 하지만 사회에 퍼진 현상을 포착하고 분석한 것에 충분히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사회 분석을 보는 재미가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을 인지함으로써 우리가 그렇게 변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일 수 있을 것 같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동물 보호 서약서에 서명하지 않는다고 욕을 퍼붓는 전투적 동물 보호론자들이나 의사들에게 물리적인 폭력을 행사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낙태 반대론자를 보라.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경멸하는 종교적 광신론자나 애플 워치Apple Watch를 신봉하며 조깅 코스나 숲길을 달리는 피트니스 마니아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의 세계에서 확실성은 찾아보기 힘든 개념이고, 불확실성과 불안은 일상적인 경험으로 자리 잡았다.
상처를 받는 상황에서도 확신과 확실성을 되찾을 방법이 있다. 즉 광신주의에 이를 때까지 태도와 행동의 급진성을 점점 강화하는 것이다. 이 같은 자기 확신과 안정을 약속하는 방법을 선택하는 이들이 점점 증가하고 있다.
급진주의와 광신주의는 현대사회가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요구하는 불가피한 답이 아니라 대중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하나의 선택으로 보인다.
개인적 자유가 생겨날 때마다 삶의 불확실성과 불안감도 커졌다. 실패하더라도 그 책임은 타인이나 사회의 몫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돌아갔다.
자유의 증대, 문화적 다양성의 확대와 같은 긍정적 측면은 방향성의 문제나 새로운 사회적 불균형 혹은 사회적 결속력의 와해 위험과 같은 그림자를 완전히 덮지 못하고 있다.
결핍으로 고통받는 불안한 개인은 분명한 지향점이나 헌신, 의심할 바 없는 결속과 모호함이 없는 규칙과 규범을 발견하고 세상을 친구와 적으로 이분화시킴으로써 자신감과 자기가치감을 되찾고, 이전의 불확실성과 불안함을 잊어버릴 수 있다.
감정적 사고는 양극성에 자리 잡고 있다. 이것 아니면 저것, 옳은 것과 그른 것, 거짓과 진실, 선함과 악함, 우리 아니면 남,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을 구분하는 것이다.
광신자들은 증오로 가득 찬 광신주의를 통해 자기가치감을 갉아먹던 결핍감을 보상받는다. 광신주의는 갈망하였으나 얻지 못했던 단순 명료함, 확고한 진실 욕구를 충족시켜준다. 이들을 온갖 의심과 불확실함에서 보호해줄 안전함과 정착 체계를 제공한다.
소셜미디어의 감정적 역동성은 유행의 흐름을 타는 해시태그를 따라 흥분의 파도를 몰고 오며 증오 공동체를 부추기며 조직하고 격려한다.
건강식품이 종교를 대신하여 자기가치감과 안정감을 제공하는 것이다. 건강식품탐욕증에 걸린 이들은 구축해놓은 식습관을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불안과 스트레스, 죄의식을 느끼거나 자기혐오에 빠진다.
성스러운 원칙과 과거의 확신을 지키기 위한 투쟁 속에서 이들은 다른 모든 비채식주의자들보다 우월하고 순수한 존재라고 느끼며 도덕적 우월성을 증명할 수 있는 적을 찾아 나선다.
상호 간에 강화된 적대적 흐름 속에서 공통적 정서나 다른 삶의 방식을 존중하고 전선을 가로질러 사회적 통합을 추구하는 노력은 사라진다.
급진주의와 광신주의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감정의 강도와 질에 달려 있다. 급진주의자들이 급진화를 이끈 대상에 분노와 복수심, 경멸감과 모욕감을 느끼고 광신주의자들은 광신주의의 대상에 대한 완벽한 파괴욕과 끝없는 증오심을 느끼는 특징이 있다. 증오는 뜨거운 감정이자 사람의 생각과 행동의 원천이며 광신자를 급진주의자와 구분하는 기준이다.
많은 광신자의 언어와 행동에서 묻어나오는 이 같은 고삐 풀린 억제의 사례를 우리는 충격적 혐오 개념에서 볼 수 있다.
이들은 자신과 같은 비전을 공유하지 않는 모든 사람과 절연하고 SNS를 통해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과 소통하며 광신적 신념에 맞지 않는 모든 메시지는 지속적으로 무시하거나 부정하고 재해석하고 오역하기도 한다.
자신의 관점을 변화시키는 것을 주저하며 유연한 사고와 행동을 하는 것을 명분을 배신하는 것으로 보는 사람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에 적응하는 능력을 잃어간다. 완고하고 움직일 줄 모르며 단순하고 극단적인 지식과 사고 체계를 가진 광신자는 유연한 사고를 이해할 수 없다.
“유머는 상대주의이다. 유머는 누가 옳든, 어떤 부당한 일이 벌어졌든 세상 모든 일에는 우스꽝스러운 부분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능력이다.” 아모즈 오즈는 이 말을 하면서 일생동안 유머감각을 갖춘 광신자를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시민사회의 헌신을 통해 이해와 상호지원, 연대와 공정함에 의해 뒷받침되는 품위 있는 사회구조를 만들어가려는 노력이 계속되는 한 우리는 현대사회의 광신적 신호가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광신주의로 바뀌지 않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