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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독후감

[독후감] 책, 이게 뭐라고 - 장강명

by 이윤도 2021. 5. 27.
<책, 이게 뭐라고> 장강명



저지소개
이름: 장강명 약력: 소설가. 장편소설 『표백』으로 한겨레문학상을 받으며 소설가로 데뷔했다. 『한국이 싫어서』 『댓글부대』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등 다수의 장편소설과 연작소설집 『산 자들』, 소설집 『뤼미에르 피플』 이 있다. 르포르타주 『당선, 합격, 계급』과 에세이집 『5년 만에 신혼여행』을 썼다. "


소설 작가의 팟캐스트 진행 경험을 바탕으로 쓴 에세이다. 책 제목에 이끌려 읽었는데, 팟 캐스트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었다.


팟캐스트 진행 관련 일화와 읽고 쓰는 행위에 대한 생각, 책과 독서 행위의 의미와 출판업게에 대한 생각 등 다양한 주제로 구성된 에세이다. 책의 목차가 인상적이었는데, 다소 생뚱맞은 목차 제목이었지만 내용을 읽으면 그때서야 이해가 가는 키워드로 구성되어있었다. 읽고 쓰는 편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많은 내용에 공감을 했고, 인상적으로 읽었다. 본인이 염세적인 편이라 말했지만, 사실 그리 염세적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나도 염세적인 사람이라서 그런걸까. 그런 면이 더욱 매력적이었다.


출판이 완전한 팬덤 비즈니스가 되는 것을 우려하는 저자의 생각에 공감이 갔다. 베스트셀러가 되려면 책의 내용이 아닌 저자가 스타성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오던 차였다. 요즘엔 특정 작가라면 무조건적으로 지지하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또한, 잘 팔린다싶은 책의 저자들은 SNS계정을 기반으로 많은 팔로워들을 거느리고 있는 모습을 보아왔다. 저자에게 화제성이 있어야 책이 잘 팔린다니,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책이 회제성을 가지고 저자가 유명해지는 순서를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쁜 표지 디자인에 비해 공허했던 책들도 떠올랐다. 저자는 이런 문화가 발전하여 소비재 산업 전체가 팬 장사가 되는 것을 우려했다. 독서를 비판, 숙고, 성찰의 도구로 활용하는 저자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출판업계 문화에 나 또한 괴리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이에 독서를 통해 무엇을 얻고자 하는지, 왜 독서를 하는지에 대한 성찰을 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읽고 쓰는 인간에 대한 저자의 생각에 많은 공감을 했다. 저자가 말하고 듣는 사람들과 읽고 쓰는 사람간의 차이에 대해서 말할 때, 지난 날 내가 간혹 느껴온 그 괴리감들이 설명되었다. 그 중에서도 읽고 쓰는 사람은 반성하는 인간, 공적인 인간이 되어 진지한 인간이 된다는 저자의 생각에 공감할 수 있었다. 현대 사회에서 이런 사람은 진지충이라며 재미없는 사람으로 평가받기 일쑤이다. 그래서 나는 이런 면을 감추고자 하는 편이지만 말이다(이렇게 글을 올리며 그런 에너지를 풀고 있다).


저자는 읽고 쓰는 사람들, 진지해진 인간들은 그들의 핵심인 일관성을 역이용당하며 공격당한다고 했다. 이 부분을 읽으며 일관성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는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일어나지도 않은 이런 공격이 두려워 자기검열을 해왔고, 많은 글들을 낙서로만 흘려보냈었다. 스스로 검열하느라 방문자가 몇도 되지 않는 이런 블로그에도 올리지 못했던 것이다. 특별히 이상한 글이라서가 아니다. 다만, 내가 지금 쓴 생각이 훗날에 달라지면 어쩌지, 라는 두려움이 있었다. 저자는 이러한 일관성에 대한 공격의 방어 전략으로 시니컬해졌다고 했다. 나는 <뼛 속까지 내려가서 써라>에서 읽은 말처럼, 글을 쓰는 순간에 생각과 현재는 다름을 인지하며 이겨내려했으나, 공격하는 사람들은 이를 고려해주지 않을 것이기에 저자의 전략을 따르는 것이 더 효율적인 대처방법이라는 생각도 했다.


이 외에도 많은 부분을 흥미롭게 읽어서 어떤 부분을 더, 어떻게 적어야 할지 모르겠다. 독자에게 끊임없이 시비를 거는 고전으로 보는 소설의 역할, 저자가 작가로서 가지고 있는 고민, 긴 글이 사라지며 변화해가는 세상에 대한 우려, 다독에 대한 강박을 가진 사람들과 책의 효용 등.. 저자가 추천하는 책 목록은 덤이다. 읽고 쓰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나는 에세이 독후감을 적는게 가장 힘들다. 한 가지 주제의식으로 관통된다기보다, 다양한 이야기들이 펼쳐져 있어서 그런 것 같다. 그 중에 어떤 내용을 선택해서 적어야 할지 고민이 심해진다. 그래도 이렇게 적고나니 책을 읽은 후 섞여있던 많은 생각이 조금이나마 정리가 된 것 같아 기분이 좋다. 저자의 말을 마지막으로 독후감을 마쳐야겠다.

나는 길고 복잡한 언어가 지배하는 세상이 두렵지 않다. 나는 그 세상에서 육신을 벗고 언어의 일부가 되고 싶다. 같은 꿈을 꾸는 나의 동족들, 읽고 쓰는 종족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아예 지면을 딛고 선 볼품사나운 다리를 잘라내고 날아오르고 싶다. 그럴 수 없어 서글프다.


한 인간이 작가이면서 동시에 세일즈맨이기란 쉽지 않다. 내가 아는 진지한 작가들은 모두 책 홍보 활동을 부담스러워하고, 괴로워한다. 다들 신작을 내면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본인은 가만히 있는데 언론이 관심 가져주고 띄워주기를 바란다.
작가는, 쓰는 인간은 독자에게 영웅 같은 존재다. 그런 존재를 말하는 인간으로 대면했을 때 우리는 당황하게 된다.
이제는 한국의 출판업이 사실상 ‘셀럽 비즈니스’가 된 게 아닌가 싶다. 셀러브리티가 쓴 책이 잘 팔린다. 아니, 셀러브리티가 쓴 책만 잘 팔린다. 아예 처음부터 셀러브리티를 섭외해서 책을 만든다. 실제로 원고를 쓰는 거야 다른 사람이 얼마든지 해줄 수 있다. 셀러브리티이기만 하다면 반려견도 만화 캐릭터도 책을 낼 수 있다. 나는 한편으로는 그런 현실이 못마땅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알쓸신잡’에서 연락이 오기를 고대하는 마음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긴 글을 읽기 싫어한다. ‘누가 요약 좀’이라거나 ‘너무 길어서 읽지 않았습니다’라는 댓글을 남긴다. 쓰는 인간들과 그들의 매체는 그렇게 점점 자리를 잃어간다.
말하고 듣는 인간들을 위한 매체 환경은 기업들의 천국이다. 깊이 사고하는 사람은 충동적으로 구매 버튼을 누르지 않으니까. 소비자들이 생각보다 먼저 반응을 할수록 판매자와 플랫폼 운영자가 돈을 번다. 그들은 우리가 더 원시적인 동물이 되도록 부추긴다. 백화점 인테리어는 점점 더 휘황찬란해지고, 페이스북에서는 점점 더 텍스트보다 이미지와 동영상이 많아진다.
요즘의 정치 운동, 사회 운동 들은 철학 대신 열광을 연료로 삼는다. 현대사회는 이런 식으로 동물화하는 것 같다.
현대사회는 진지한 인간들을 싫어한다. 광고와 열광에 기대야 하는 이들은 거대한 질문, 예를 들어 ‘왜’ 같은 물음에 “그냥요”라든가 “재미있으니까!”라고 답하는 부류를 선호한다. 의미가 아니라 느낌을 추구하는. 그런 이들은 ‘왜’ 같은 질문에 긴 답을 품은 사람들을 떨떠름히 여기고, 진지충이라고 놀린다.
말하고 듣는 사람 사이에서는 예의가 중요하다. 읽고 쓰는 사람 사이에서는 윤리가 중요하다.
예의는 감성의 영역이며, 우리는 무례한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 감수성을 키워야 한다. 윤리는 이성의 영역이며, 우리는 비윤리적인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 비판 의식을 키워야 한다. 전자도 쉽지 않지만 후자는 매우 어렵다.
책은 고집스럽게 한 가지 주제를 이야기한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책이 묻는 질문에 답변해야 한다.
발췌독이나 독서 권태기를 묻는 배경에는 공통적으로 ‘책을 많이 읽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다’는 부담감과 초조함이 있는 듯하다. 이런 고민은 ‘책을 많이 읽는 게 자랑거리’라는 허영심과도 연결된다. 책에서 원하는 부분만 찾아 읽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런데 그렇게 몇몇 대목만 훑은 책을 ‘읽었다’고 주장하면 사소하기는 해도 기만이다. 자신을 향해서든, 남을 향해서든.
책 읽는 사람이 줄어드니 독서가 칭찬받아야 할 일이 되었고, 한쪽에서는 책 읽기를 숙제로, 한쪽에서는 뽐낼 거리로 여기게 되었다.
독서가들 중에는 손끝에 닿는 책장의 느낌이니 종이 냄새니 하면서 종이책의 물성에 대한 애정을 호들갑스럽게 과시하는 이들이 있는데, 나는 그게 이상한 자부심과 선민의식에서 비롯된 건 아닌가 의심한다. 책은 정보를 담는 매체지 시각이나 촉각을 만족시키려고 만든 기호품이 아닌데. 나는 리커버 에디션이니 초판본이니 하는 유행도 별로다.
내가 지키고 싶은 것은 종이책의 물성이 아니라 책이라는 오래된 매체와 그 매체를 제대로 소화하는 단 한 가지 방식인 독서라는 행위다.
나는 책에서 글이 아닌 것에 대한 애정을 의도적으로 줄이기로 했다. 그렇게 책의 변질에 저항하고 싶다.
나는 문학(혹은 책)을 읽는 게 좋은 인간이 되는 일과 그리 겹친다고 보지 않는다. 2020년 즈음 한국 문단에서는 쓰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이나 문학을 무슨 인격 수양처럼 여기는 게 기본 정서 같지만.
에세이를 쓰면 치유되는 느낌이다. 그런데 내게 에세이 작업의 매력은 거기까지다. 세계에 맞선다는 기분이 들지 않는다. 세상과 함께 흘러간다는 느낌이다.
가끔은 한국문학이 이제는 일반 대중과 거의 유리되어, 전국에서 몇 만 명 정도가 즐기는 독립 예술이나 마이너 장르가 된 게 아닌가 싶은 폐쇄감이 든다.
말하고 듣는 세계에서 돈을 버는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자기 자신이라는 한 인간, 한 인격을 판매해야 하는 것 같다.
문학천재 뉴요커가 서른에 쓴 작품이라니, 어떤 삶의 질곡이 담겨 있을지, 서울 구로구 주민의 마음도 흔들 수 있을지, 매번 책을 집어 들기 직전에 망설여진다.
고전은 독자에게 얌전하게 교훈을 던져주지 않는다. 그들은 독자들이 피할 수 없는 방식으로 시비를 건다. 자신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고, 이 존재가 무슨 의미인지 알아맞혀보라고 묻는다. 그것이 고전의 힘이다.
두 책을 읽다가, 나약한 인간으로만 알았던 다자이가 작품을 위해 자기 치부를 드러내는 데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음을 깨닫고 그 결기에 간담이 서늘해졌다. 나는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사실 내게 진짜 두렵고 걱정스러운 일은 사람들이 문학을 떠나는 것이 아니다. 문학과 문학을 읽고 쓰는 사람들이 현실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독서는 무조건적인 지지, 열광, 숭배의 정반대에 있는 행위인데. 내게 책이란 비판, 숙고, 성찰의 도구인데.
글쓰기가 육체노동이라는 주장은 육체노동을 안 해본 사람이나 할 수 있는 말이라고 여긴다. 물론 글쓰기에도 체력은 필요하다. 하지만 제대로 육체노동을 한 날에는 하늘이 노랗다. ‘창작의 고통’도, 세상의 다른 고통에 비하면 대단치 않다.
‘좋은 책’은 취향의 문제를 넘어 가치관의 영역이다. 아마 세상에는 누구나 좋아하고 누구에게나 좋은 와인도 없을 것이다. 하물며 책은 더 그러하다. 소설의 영역으로만 좁혀도 그렇다.
나는 질리도록 오락 소설을 읽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양식화된 전형典型에 물려 변형을 찾아나갈 때 아이의 내부에 개성과 깊이가 조금씩 생겨서 굳어진다. 내가 그랬다. 그렇게 해서 지금의 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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