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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독후감

[독후감] 공정하다는 착각 - 마이클 샌델

by 이윤도 2021. 5. 18.
<공정하다는 착각> 마이클 샌델

저자 소개
2010년 이후 한국에 ‘정의’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27세에 최연소 하버드대 교수가 되었고, 29세에 자유주의 이론의 대가인 존 롤스의 정의론을 비판한 《자유주의와 정의의 한계》를 발표하면서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었다. 1980년부터 하버드대에서 정치철학을 가르치고 있으며, 그의 수업은 현재까지 수십 년 동안 학생들 사이에서 최고의 명강의로 손꼽힌다. 샌델이 진행 중인 영국 BBC의 정치철학 토론 프로그램 〈위대한 철학자들〉 시리즈는 ‘철학적 아이디어의 이면을 탐구한다’는 주제로, 세계 각국의 토론자들이 참여하고 있다. 대표 저서로 27개국 언어로 번역된 베스트셀러 《정의란 무엇인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비롯해, 《정치와 도덕을 말하다》, 《완벽에 대한 반론》, 《마이클 샌델, 중국을 말하다》(공저) 등이 있다.


월정액 구독 서비스에 없는 책이라 구매해서 읽었다. 관심을 가지고 읽게 된 계기에 대한 할 말이 많아 두 번을 썼다가 지웠다. 정치인 관련 특혜 의혹들에 대하여 공정했다는 주장을 하는 지지지들이 한둘이 아니지 않나. 물론 공정한 세상이란 이상적인 생각일 뿐이라는 걸 알지만, 가끔 이건 좀 심한 것 아니냐는 생각을 할 때가 종종 있다. 그러던 차에 이 책이 시선을 잡아 끈 것이다.


공정한 사회를 위한 특별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책은 아니었다. 하지만 공정하다는 착각을 일깨워 주는 책이다. 이를 인지하는 것이 왜 중요할까? 저자는 우리가 능력주의에 빠져들어가면서, 사회적 연대가 약화되고 공동선에 대한 논의가 사라져가는 것을 우려했다. 부유한 사람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그럴만하니까 그런 것'이라는 생각으로 서로를 신경쓰지 않는 사회를 우려한 것이다. 저자의 말대로 승자는 오만해지고 패자는 자책하게 된다. 이런 인식은 승자에게조차 좋지 않다. 능력주의 인식 아래에서 능력 경쟁은 한 두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승자조차 지속되는 경쟁의 압박에 짓눌린 채 살아간다. 저자는 이러한 사회 모습에 경각심을 갖고, 공정한 능력 경쟁과 그에 따른 분배라는 착각에서 벗어나 더 나은 사회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할지 생각해봐야한다고 주장한다.

  능력의 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승리자다. 그러나 상처 입은 승리자다. 나는 그 사실을 내 학생들을 보고 알았다. 그들은 오랫동안 불타는 고리를 뛰어 통과하는 일을 거듭해왔고, 그 습관을 쉽게 버리지 못한다. 많은 아이들이 아직도 분투하고 있다.  



책을 읽으며 능력주의가 우리 사회에 미친 부정적 영향들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학력에 따라, 운전하는 차량에 따라, 또는 직업에 따라 사람을 깔보거나 경외시 하는 사회의 모습들 말이다. 저자의 말대로, 공정하지 않은 경쟁과 이를 바탕으로 얻은 능력에 따라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인가? 경쟁이 완벽하게 공정할 수 없다면 우리는 경쟁을 통해 얻은 능력으로 사람의 가치를 판단할 수 없다. 하지만 절대적인 공정함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각자의 행운을 인지하고 타인의 불행을 이해하며 더 나은 사회를 위해 무너져가는 사회적 연대를 재건해야한다.


나는 이 책을 읽고나서, 능력주의적 인식이 학력뿐만 아니라 다양한 혐오 문제와도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개인적 의사가 반영되지 않은 모든 차이들로부터 파생되는 차별과 혐오 문제 말이다. 경쟁과 능력에 따른 분배라는 절대적 구호 아래 개인들이 가진 차이는 고려되지 못하고 결과의 승복은 강제된다. 저자의 말대로 '그럴만하니 그런 것'이라는 인식 아래 논의되지 않는 문제들이 많을 것이다. 새삼스럽게도 능력주의적 인식 아래 사회적 연대가 어떻게 무너져왔는지, 경쟁의 패배자에게 얼마나 폭력적일 수 있는지 과거 여러 경험을 되살리며 생각해볼 수 있었다.



흥미롭게 읽었지만, 그 중에서 특히 인상적이었던 내용들은 다음과 같다.

그러나 오늘날 사회적 이동이 가장 잘 일어나는 국가들은 평등 수준 또한 가장 높은 국가들인 경우가 많다. 이를 보면 사회적 상승의 능력은 가난이 주는 압박에서 벗어나려는 개인의 의지보다는 교육, 보건을 비롯해 직업 세계에서 개인을 뒷받침해 주는 수단에 대한 접근성에 달려 있는 듯 보인다.

결과의 평등이 아닌, 개인을 뒷받침해주는 여건의 평등이라해야할까. 평등을 말하면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등을 떠올리는 극단주의자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흘러가는 현실이 인상적이었다.

비록 여러 사회에서 지난 수십 년 동안 한 결 같이 부모의 개입이 심해지긴 했으나, 가장 심했던 곳은 불평등이 가장 크게 두드러진 곳이었다. 가령 미국이나 한국 같은 나라였다.

개인적으로 특정 인물을 바라볼 때, 배경을 확인해보게 된 이유이다. 특히, 자기계발서를 읽을 때는 무조건 저자의 배경을 알아보고 고르는 편이다. 간혹, 자신이 가졌던 행운을 인지하지 못하고 모든 공을 자신에게로만 돌리는 사람을 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이 하는 말은 대체로 공허했다.

능력주의의 폭정을 극복한다는 게, 능력이 직업과 사회적 역할의 배분에 아무 역할도 못하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대신 그것은 성공에 대한 우리의 시각을 바꾸고, ‘정상에 오르는 사람은 스스로 잘나서 그런 것’이라는 능력주의적 오만에 의문을 제기함을 뜻한다.

우리가 가진 인식의 변화와 이를 통한 공동선에 대한 숙고가 필요하다는 의견에 공감했다. 절대적으로 공정한 세상은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러한 인식 변화를 통해 실패하고 패배한 사람들을 보는 사회적 시선이 조금이나마 관대해졌으면 좋겠다. 이런 인식 변화는 실패를 두려워하는 승자들의 불안감도 약간이나마 해소시켜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유능자를 제비뽑기로 뽑자는 대안의 가장 유력한 근거는 그렇게 함으로써 능력의 폭정과 맞설 수 있다는 점이다. 일정 관문을 넘는 조건으로만 능력을 보고, 나머지는 운이 결정토록 하는 일은 고등학교 시절의 건강함을 어느 정도 되찾아줄 것이다.  

재미있는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대학 입시에서 특정 성적을 넘은 사람들 사이에서 제비뽑기로 합격자를 가린다니. 이렇게 함으로써 여러 가식적이고 무의미한 준비 과정을 간략히 하고 제도를 효율적으로 이용하지 못해 생기는 지역별 격차를 줄일 수 있을수도 있겠다.


  노력과 재능의 힘으로 능력 경쟁에서 앞서 가는 사람은 그 경쟁의 그림자에 가려 있는 요소들 덕을 보고 있다. 능력주의가 고조될수록 우리는 그런 요소들을 더더욱 못 보게 된다.  
  우리가 스스로를 자수성가한 사람 또는 자기충족적인 사람으로 볼수록 감사와 겸손을 배우기가 어려워진다. 그리고 그런 감성이 없다면 공동선에 대한 배려도 힘들어지게 된다.  
그러나 오늘날 사회적 이동이 가장 잘 일어나는 국가들은 평등 수준 또한 가장 높은 국가들인 경우가 많다. 이를 보면 사회적 상승의 능력은 가난이 주는 압박에서 벗어나려는 개인의 의지보다는 교육, 보건을 비롯해 직업 세계에서 개인을 뒷받침해 주는 수단에 대한 접근성에 달려 있는 듯 보인다.
빈부격차에 대한 진지한 대응은 무엇이든 부와 권력의 불평등을 직접 다뤄야만 하며, 사다리를 오르는 사람들을 돕는 방안으로는 무마될 수 없다. 사다리 자체가 점점 오르지 못할 나무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능력주의적 오만은 승자들이 자기 성공을 지나치게 뻐기는 한편 그 버팀목이 된 우연과 타고난 행운은 잊어버리는 경향을 반영한다. 정상에 오른 사람은 자신의 운명에 대한 자격이 있는 것이고, 바닥에 있는 사람 역시 그 운명을 겪을 만하다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기술관료적 정치의 도덕적 자세이기도 하다.
자신의 곤경은 자신 탓이라는 말, “하면 된다”라는 말은 양날의 검이다. 한편으로는 자신감을 불어넣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모욕감을 준다. 승자에게 갈채하며 동시에 패자에게 조롱한다. 패자 스스로마저도 말이다. 일자리가 없거나 적자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나의 실패는 자업자득이다.
능력주의의 폭정으로 상처를 입었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문제는 ‘월급이 오르지 않는다’는 것만이 아니라 그들의 ‘사회적 명망이 추락했다’는 것이다.
내 성공이 순전히 내 덕이라면 그들의 실패도 순전히 그들 탓이 아니겠는가. 이 논리는 능력주의가 공동체 의식을 약화시키는 논리로 기능한다. 우리 운명이 개인 책임이라는 생각이 강할수록 우리가 다른 사람까지 챙길 필요를 느끼기 힘들다.
능력주의적 오만의 가장 고약한 측면은 학력주의에서 찾을 수 있다.
대학 학력의 무기화, 그것은 능력주의가 얼마나 폭정을 자행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최근 수십 년 동안 능력주의에 더욱 물들게 되면서, 엘리트들은 출세하지 못한 사람들을 깔보는 버릇마저 들었다. 대학에 가서 자신의 조건을 향상시키라고 노동자들에게 골백번 되풀이하는 말은 아무리 의도가 좋을지라도 결국 학력주의를 조장하고 학력 떨어지는 사람들의 사회적 인식과 명망을 훼손한다.
그러나 역사를 보면 뛰어난 학력과 실천적 지혜 또는 공동선 실현에 대한 본능적인 욕구가 서로 그다지 일치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좋은 통치는 실천적 지혜와 시민적 덕성을 필요로 한다. 공동선에 대해 숙고하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러나 둘 중 어느 것도 오늘날 대부분의 대학에서는 함양될 수 없다. 최고의 명문대라 할지라도 말이다.
‘최고의 인재들’이 저학력자 동료 시민들보다 통치를 잘한다는 생각은 능력주의적 오만에서 비롯된 신화일 뿐이다.
의회를 고학력자 계층의 전유물로 만들면 정부가 더 효과적인 방향으로 가기 힘들다. 대표성만 더 낮아질 뿐이다.
능력주의의 이상은 불평등을 치유하려 하지 않는다. 불평등을 정당화하려 한다.
시장 수요에 부응한다는 건 단지 사람들이 우연히 갖게 된 욕구와 욕망을 충족시켜준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런 욕구 충족이 윤리적 중요성을 갖느냐는 확실히 논란의 여지가 많다.
명예와 인정의 문제는 분배적 정의와 결코 깔끔하게 분리될 수 없다. 이는 특히 불우한 사람들에 대해 보상할 때 ‘내가 너희를 후원해 준다’ 식의 자세가 은연중 깔려 있을 경우 더욱 그렇다.
일하지 않기로 선택했다면 그는 그 결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일부 행운 평등주의자들은 이보다 훨씬 책임 관념을 확장한다. 그들은 여러 가능한 위험에 대비해서 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선택조차도 ‘그에게 벌어진 불운이 온전히 그의 책임이게끔 한다’고 주장한다.
공적 부조의 자격 요건을 갖추려면 자신이 어쩔 수 없는 외부적 힘의 희생자란 걸 제시해야 하며, 스스로도 그렇게 믿어야 한다. 이 이상야릇한 인센티브는 청원자의 자아상을 망쳐 놓을 뿐 아니라, 공적 담론까지 비틀어버린다. 행운 평등주의에 근거해 복지국가를 옹호하는 자유주의자들은 거의 필연적으로 복지 수혜자들을 무능력자로,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들로 묘사하게 된다.
‘능력주의’라는 말은 본래 비하의 의미를 갖고 만들어졌다. 그러나 찬양과 갈망의 용어가 되어버렸다.
능력주의의 폭정을 극복한다는 게, 능력이 직업과 사회적 역할의 배분에 아무 역할도 못하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대신 그것은 성공에 대한 우리의 시각을 바꾸고, ‘정상에 오르는 사람은 스스로 잘나서 그런 것’이라는 능력주의적 오만에 의문을 제기함을 뜻한다.
소득 사다리의 단이 하나씩 높아질수록, SAT 평균점수는 올라간다.
미국의 고등교육은 대부분의 사람이 최상층에서 올라타는 엘리베이터와 같다.
아무나 들어가기 힘든 대학에 들어갔다는 사실은 단지 뽐낼 수 있는 근거가 될 뿐이 아니며, 졸업 후 좋은 직업을 얻을 근거도 되었다. 이는 고용주들이 명문대 졸업생을 비명문대 졸업생들보다 더 많이 배운 인재로 판단해서라기보다는, 대학들의 인재 선별 역할을 믿고 그들이 부여하는 능력주의적 영예를 높이 치기 때문이다.
비록 여러 사회에서 지난 수십 년 동안 한 결 같이 부모의 개입이 심해지긴 했으나, 가장 심했던 곳은 불평등이 가장 크게 두드러진 곳이었다. 가령 미국이나 한국 같은 나라였다.
능력의 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승리자다. 그러나 상처 입은 승리자다. 나는 그 사실을 내 학생들을 보고 알았다. 그들은 오랫동안 불타는 고리를 뛰어 통과하는 일을 거듭해왔고, 그 습관을 쉽게 버리지 못한다. 많은 아이들이 아직도 분투하고 있다.
고등교육은 그 영예의 대부분을 그것이 공언한 고등 목표에서 찾아야 한다. 그것은 학생들이 직업 세계에서 필요한 역량을 갖추게만 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들이 도덕적인 인간이자 민주적인 시민으로서 공동선에 대해 숙고할 수 있는 사람이게끔 준비시키는 것도 필요하다.
경제 문제에 대한 고려는 각자의 주머니에 얼마나 들어오느냐의 문제만이 아니며, 각자가 경제 활동에서 갖는 역할이 사회적으로 어떤 평가를 받느냐도 포함한다.
그것이 약속하는 물질적 혜택을 넘어 경제성장을 공공정책의 최우선 과제로 삼는 까닭은 우리 사회처럼 갈등이 많은 다원적 사회에 매력적이라서다. 이는 골치 아픈 도덕 논쟁을 우회할 빌미가 된다.
오직 열렬한 자유지상주의자만이 부유한 카지노 왕의 사회적 기여가 소아과 의사의 기여보다 정말로 1,000배나 가치 있다고 떳떳이 주장할 수 있으리라.
2020년 코로나19 바이러스 팬데믹은 잡화상 계산원들, 배달원들, 방문 의료서비스 담당자들, 그 밖의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으면서도 박봉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해주었다. 아주 잠깐이라도 말이다. 그러나 시장 사회에서는 우리가 버는 돈과 우리가 공동선에 기여한 내용의 가치를 혼동하기 쉽다.
공동선은 불가피하게 논란의 여지를 포함한다. 그러나 일의 존엄에 대한 새로운 논쟁은 우리의 당파적 경향을 무너뜨릴 것이고, 우리의 정치 담론을 도덕적으로 활성화할 것이며, 우리가 40년 동안 시장의 신앙과 능력주의적 오만에 빠져든 탓에 양극화된 정치 현실을 넘어설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이런 불일치에다 금융 종사자들이 투기 활동을 하면서도 분에 넘치는 명성을 누리는 현실은 실물경제에서 유용한 재화와 용역을 생산하며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의 존엄을 조롱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세금 징수는 세입을 올리는 방법만이 아니다. 한 사회가 과연 무엇을 공동선에 대한 가치 있는 기여로 여기는가에 대한 판단을 제시하는 것이다.
나는 제안한다. 급여세의 전부 또는 일부를 없애는 대신 금융거래세를 일종의 ‘죄악세’로 신설하여 카지노나 다름없고 실물경제에는 전혀 도움이 안 되는 투기 행위를 억제하는 방안을 토론의 주제로 삼을 것을. 당연히 다른 입장들이 있을 것이다. 나는 넓게 보아 일의 존엄을 회복하려는 것이고, 그러려면 우리 경제질서에 대한 근본적인 도덕적 질문들을 던져야 한다. 최근 수십 년 동안 기술관료적 정치가 숨겨 왔던 질문들 말이다.
극소수 사람들의 영웅적인 성공 사례에 고무되어 다른 이들도 역경을 헤쳐나갈 수 있다고 여길 수 있다. 그들이 벗어나고픈 환경을 개선하려 하기보다, ‘불평등의 해답은 이동성’이라는 말만 늘어놓는 정치를 추구할 수 있다. 장벽을 허무는 일은 좋다. 누구도 가난이나 편견 때문에 출세할 기회를 빼앗겨서는 안 된다. 그러나 좋은 사회는 ‘탈출할 수 있다’는 약속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시장이 각자의 재능에 따라 뭐든 주는 대로 받을 자격이 있다’는 능력주의적 신념은, 연대를 거의 불가능한 프로젝트로 만든다. 대체 왜 성공한 사람들이 보다 덜 성공한 사회구성원들에게 뭔가를 해줘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우리가 설령 죽도록 노력한다고 해도 우리는 결코 자수성가적 존재나 자기충족적 존재가 아님을 깨닫느냐에 달려 있다. 사회 속의 우리 자신을, 그리고 사회가 우리 재능에 준 보상은 우리의 행운 덕이지 우리 업적 덕이 아님을 찾아내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 운명의 우연성을 제대로 인지하면 일정한 겸손이 비롯된다. “신의 은총인지, 어쩌다 이렇게 태어난 때문인지, 운명의 장난인지 몰라도 덕분에 나는 지금 여기 서 있다.” 그런 겸손함은 우리를 갈라놓고 있는 가혹한 성공 윤리에서 돌아설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은 능력주의의 폭정을 넘어, 보다 덜 악의적이고 보다 더 관대한 공적 삶으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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