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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독후감

[독후감] 1984 - 조지 오웰

by 이윤도 2021. 6. 27.

<1984> 조지 오웰


저자 소개
조지 오웰 George Orwell,Eric Arthur Blair(본명), 본명은 에릭 아서 블레어Eric Arther Blair. 1903년 6월 25일, 인도의 벵골 주 모티하리에서 하급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8세 때 사립예비학교에 들어갔으나, 이곳에서 상류층 아이들과의 심한 차별을 맛보며 우울한 소년시절을 보냈고, 장학생으로 들어간 이튼교에서의 학창시절 역시 계급 차이를 뼈저리게 실감하는 계기가 되었다.

졸업 후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1922년부터 5년간 미얀마에서 대영제국 경찰로 근무했으나 점차 자신의 직업에 회의를 느껴 직장을 그만두고 파리로 건너가 작가수업을 쌓았다. 유럽으로 돌아와 파리와 런던에서 부랑자 생활을 하고 잠시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거쳐 영국 노동자들의 삶에 관한 조사 활동에 참여했다. 이때를 토대로 한 소설이 1933년의 첫 소설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생활』과 1935년『버마 시절』이다.




유명한 디스토피아 소설인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읽었었다. 이와 더불어 조지 오웰의 <1984>도 워낙 유명했고 친구의 추천도 있었어서 읽어보게 되었다. <멋진 신세계>가 유토피아적 디스토피아로서 사람들이 깊은 생각을 스스로 포기하는 사회를 그렸다면, <1984>에서는 철저한 감시와 통제로 이루어진 디스토피아 사회를 볼 수 있었다.


<1984>는 실재하는지도 모르는 '빅 브러더'라는 인물과 당에 대한 절대적 충성을 요구하는 사회를 그리고 있다. 소설 속 사회의 곳곳에 붙여진 포스터 글귀인 '빅 브러더가 당신을 보고 있다'가 의미하듯이, 사람들은 자신의 집 안에서도 텔레스크린이라는 기기를 통해 감시 당한다. 심지어 빅 브러더의 사상에 반하는 행위를 하면 가족 간에도 서로를 사상경찰에 신고하기도 한다. 또한, 과거를 조작하여 충성을 유도하며, 항상 공포와 증오의 대상을 만들고 분노를 조장하는 사회를 그렸다. 이러한 배경 아래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권력을 쥐고 부유한 생활을 영위하는 사회에서 주인공이 다른 사상을 갖게 되며 생기는 일들을 묘사한 소설이다.

책을 읽으면서 소설이 다소 극단적이기는 하지만 우리 사회에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 미약하게나마 겹쳐 보일 때도 있었다. 그런 우려를 일으켰던 현대 사회의 모습은 아래와 같다.


첫 째로, 빅 브러더에 대한 일방적 찬양과 반대파에 대한 혐오를 보며 우리 사회의 정치에 팬덤 문화가 끼어드는 것이 생각나 우려스러웠다. 정치에 있어서도 일종의 팬덤이 형성되고 절대적인 지지와 상대측에 대한 혐오를 표출하는 것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는 요즘이다. 심지어 같은 당에서조차 특정 인물의 강성 지지층이 다른 상대에게 문자테러를 가한다는 뉴스를 본 기억도 떠올랐다. 맹목적 충성과 적에 대한 증오라는 면에서 소설 속 사회상과 현실이 겹쳐 보인 것이다.


이에 지지와 광신의 차이가 무엇이며 광신을 막기 위해 사회의 일반 구성원들은 어떻게 행동해야할지 생각해보았다. 결국은 끊임없는 의심과 비판, 논쟁이 건전하게 이루어지는 문화가 필요하지 않을까란 생각을 했다. 귀찮다는 이유로 그들을 방관하다 보면 결국, 그들이 우리를 대표하게 되고 다른 의견을 가질 수 없게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광신자들이 목소리를 낼 때, 일반 시민들도 목소리를 내야 한다. 광신자들을 설득하거나 그들이게 대적하기 위함이 아니다. 이를 보는 다른 일반 시민 구성원들에게 우리의 존재를 알려야 한다.


다음으로, 사람을 간접적으로 조작한다는 점에 있어서 자본주의 사회 아래서 이루어지는 바이럴 광고나 이용자의 체류 시간을 늘리기 위한 sns 시스템의 설계 등이 떠올랐다. 특히, <1984>에서 '프롤'들에게 조잡한 오락거리나 가십을 던져주는 장면, 조작된 방송 내용으로 권력을 유지하는 장면 등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실생활에 별 영향도 못 끼치는 연예계 소식들에 매달려 다른 중요한 이슈들이 묻히는 현실이 떠올랐던 것이다. 자극적인 오락거리나 루머의 확산, 그에 휘둘리는 우리들.. 그런 모습이 떠올라 씁쓸했다.


또한, 공포와 증오의 대상에 대한 맹목적인 분노를 조장하는 사회의 모습에서 근래에 우리 사회의 모습이 얼핏 겹쳐 보였다. 이슈가 되는 여러 사건사고들에 대하여 명확한 근거 없는 루머의 확산과 자신만의 확신에 찬 혐오성 발언 등이 떠오른 탓이다. 이런 현상은 따로 설명할 필요도 없다. 무슨 잘못만 하면 죽일 죄로 만드는 요즘이다. 자신의 생각과 다른 상대방은 정신병자 취급을 하는 요즘이다. 이런 말에 반대하는가? 당장 sns로 들어가 자신과 의견이 다른 상대나 죄를 지은 인물에 대한 반응을 살펴봐라. 아주 쉽게 이런 반응을 찾을 수 있다.


소설 속에서는 위와 같은 행위들이 권력 유지를 위해 시민들에게 던져주는 일종의 먹잇감이나 에너지 분출구 정도였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자본을 따라 그렇게 흐른다. 증오와 분노, 가십과 거짓 등은 돈이 되기에 유튜버에 의해, 다양한 매체의 기자들에 의해 확산된다. 이런 능동성에 비추어볼 때, 나는 소설 속 사회보다 현재의 사회가 더 암울하게 느껴진다. <멋진 신세계>와 <1984>의 합체랄까. 차라리 적대할 독재자라도 있었으면 다행일 텐데. 우리는 돈에 의해 자발적인 지배를 당하는 기분이다.

일반적으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사람들을 위한 문학, 음악, 연극, 오락 등을 관장하는 부서가 따로 있었다. 이곳에서는 스포츠, 범죄, 점성술 따위가 들어 있는 쓰레기 같은 신문, 선정적인 싸구려 소설, 섹스가 판을 치는 영화, 시 생성기로 알려진 특수한 만화경에서 완전히 기계적인 방법으로 작곡된 감상적인 노래 같은 것들을 만들어 냈다.



<1984>와 <멋진 신세계>, 두 소설은 상반된 디스토피아를 다루고 있지만 명확히 보이는 한 가지의 공통점이 있었다. 사회 구성원들이 깊은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진지한 생각에는 진지충이라는 지적을 받거나, 단순하고 짧은 자극성 영상의 인기, 3줄 이상의 글은 읽지 않는다는 농담조의 글을 보는 요즘에는 이러한 공통점이 마냥 가볍게만은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얼마나 휘둘리기 쉬운 존재인지를 인지하고 모두가 이성적이고 차가운 생각으로 사회에 대한 논의를 했으면 좋겠다.


이전에는 어떤 사회적 이슈들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이 무력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모두가 침묵하게 된다면, 사회가 건강한 방향으로 발전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더욱 논쟁해야 한다. 진실을 추구하고 거짓을 벌하는데 모두가 힘을 썼으면 좋겠다. 광신주의적인 사람들에 대적하기 위함이 아니다. 양 극단에 위치한 사람들이 아닌, 우리 보통의 사람들이 살아갈 사회를 위해 우리 모두가 의견을 표출했으면 좋겠다. 부정적인 힘에 휩싸이지 말고 세상의 복잡성을 인정하며 우리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함께 고민해갔으면 좋겠다.


그는 썼다. 사상죄는 죽음을 불러오지 않는다. 사상죄는 〈그 자체가〉 죽음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모두 당이 말하는 거짓말을 믿는다면 ─ 모든 기록들이 똑같이 되어 있다면 ─ 그렇다면 그 거짓말은 역사로 흘러 들어가 진실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기억이 사라지고 쓰인 기록이 날조될 때, 인간의 생활수준이 향상되었다고 하는 당의 주장은 그대로 받아들여지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당의 주장을 검증할 어떤 척도도 없었고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혁명의 세계에서 성장한 젊은 세대는 당을 하늘처럼 불변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고 당의 권위에 도전할 생각은 꿈도 꾸지도 못하고 마치 토끼가 사냥개를 요리조리 피하듯이 당의 권위를 단순히 피하기만 할 뿐 그 밖에 어떤 것도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다.
게다가 그녀는 모든 사람들, 아니 거의 모든 사람들이 비밀리에 당을 증오하고 있으며, 만일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면 규칙을 위반해도 된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이해력이 결여되어 있는 덕분에 정신은 정상이었다. 그들은 모든 것들을 아무 생각 없이 집어삼켰으며, 무엇을 먹든 아무 탈이 없었다.
결국 계층 사회는 빈곤과 무지의 토대 위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전쟁이 일어나면 부자든 가난뱅이든 모두 위험에 빠지게 되므로, 주민들은 모든 권력을 소수 특권 계급에게 넘겨주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당연하고 피할 수 없는 조건을 의식하게 된다.
실제로 그들은 비교 기준이 없는 한, 자신들이 압제받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다.
고통 앞에서는 영웅이 없다. 그는 움직일 수 없는 왼팔을 움켜쥐고 마룻바닥에서 몸을 비틀며 계속해서 머릿속에서 뇌까렸다. 고통 앞에선 영웅이 절대 없다고.
「그렇다면 우리를 패배시키는 그 원칙이란 무엇이야?」 「모르겠습니다. 인간의 정신 같은 것입니다.」
그들을 증오하면서 죽는 것, 이것이 자유이다.
하지만 잘되었다. 모든 게 잘되었다. 투쟁은 끝이 났다. 그는 자신과의 투쟁에서 승리를 거둔 것이다. 그는 빅 브러더를 사랑했다.
선택의 영역이 좁으면 좁을수록 사고를 하고자 하는 유혹도 그만큼 적어지기 때문에 어휘 수가 매년 감소하는 것은 이득이다. 궁극적으로 뇌 중추를 사용하지 않고 목구멍에서만 말이 나오기를 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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