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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독후감

[독후감] 페스트 - 알베르 카뮈

by 이윤도 2021. 2. 24.

 

 

<페스트> 알베르 카뮈

 

 

저자 소개 : 알베르 까뮈

  1913년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 몽드비에서 출생하였다. 알사스 출신의 농업 노동자였던 아버지가 1차 세계대전 중 전사하고, 청각 장애인 어머니와 할머니와 함께 가난 속에서 자란 카뮈는 초등학교 시절 L. 제르맹이라는 훌륭한 스승을 만났다. 어렵게 대학에 진학해 고학으로 다니던 알제대학교 철학과에서 평생의 스승이 된 장 그르니에를 만나 큰 영향을 받게 되었다.

 

  대학시절에는 연극에 흥미를 가져 직접 배우로서 출연한 적도 있었다. 결핵으로 교수가 될 것을 단념하고 졸업한 뒤에는 진보적 신문에서 신문기자로 일했다. 한때 공산당에 가입했던 그는 비판적인 르포와 논설로 정치적인 추방을 당하기도 했고, 프랑스 사상계와 문학계를 대표했던 말로, 지드, 사르트르, 샤르 등과 교류하며 본격적인 작품 활동에 몰입했다. 초기의 작품 『표리(表裏)』(1937), 『결혼』(1938)은 아름다운 산문으로, 그의 시인적 자질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1942년 7월, 문제작 『이방인(異邦人) L' tranger』을 발표하면서 주목받는 작가로 떠올랐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저항운동에 참가하여 레지스탕스 조직의 기관지였다가 후에 일간지가 된 「콩바」의 편집장으로서, 모든 정치 활동은 확고한 도덕적 기반을 가져야 한다는 신념에 바탕을 둔 좌파적 입장을 견지했다. 또 집단적 폭력의 공포와 악성, 부조리함을 알레고리를 통해 형상화한 소설 『페스트』로 문학계의 대반향을 일으켰고 1951년에는 마르크시즘과 니힐리즘에 반대하며 제3의 부정정신을 옹호하는 평론 『반항적 인간』을 발표하여 사르트르와 격렬한 논쟁을 벌이다가 10년 가까운 우정에 금이 가기도 했다. 하지만, 1956년 『전락』을 발표하면서 사르트르에게 걸작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1957년 『이방인』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후 최초의 본격 장편소설 『최초의 인간』 집필 작업에 들어갔으나 1960년 자동차 사고로 생을 마쳤다.

 

  실존주의 문학의 정수라 평가받는 『이방인』에는 살인 동기를 '태양이 뜨거워서'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는 이가 등장한다. 그는 삶과 현실에서 소외된 철저한 이방인으로, 죽음이라는 한계 상황 앞에서 인간의 노력이란 것이 얼마나 부질없으며 한편으로는 그 죽음을 향해 맹렬히 나아가는 인간존재가 얼마나 위대한지 생각할 수 있게 한다.

 

  부조리에 대한 추론을 시작으로 철학적 자살, 부조리한 인간, 철학과 소설, 키릴로프 등 철학적 에세이를 엮은 『시지프의 신화』는 권위에 도전하였다는 벌로 큰 돌을 산 정상에 올리는 행위를 무한정 반복해야 하는 시지프의 죄를 모티브로 하여 일상생활과 예술작품에서 드러나는 부조리한 측면을 명쾌하게 분석한 철학 에세이다.

 

  1947년 출간된 『페스트』는 그 해의 비평가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의 걸작으로 평가 받는다. 이 작품에서 페스트는 모든 자유가 제한되는 상황 즉 감옥 속의 인간을 상징한다. 카뮈는 주인공인 의사 리외와 그 주변의 인물들을 통해 모순에 찬 삶 평온한 삶 위에 덮친 모순과 허망, 즉 부조리 속에서 그 상황을 직시하고, 낙관적 기대 없이 묵묵히 그 허망과 맞서서 대결하는 인간상을 그렸다.

 

  이런 다양한 작품들 중에서, 알베르 카뮈가 생전에 가장 아꼈던 책은 『반항하는 인간』이라고 한다. 카뮈의 철학적·윤리적·정치적 성찰을 담은 글 중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반항하는 인간』은 『시지프의 신화』와 함께 카뮈의 대표적인 시론(試論)이다. 1951년 출간 당시 프랑스 지성계를 들끓게 했던 이 책에서 카뮈는, 폭력과 테러를 역사적·철학적·정치적 맥락에서 살피며, 테러와 폭력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성찰한다.

 

  이 외에도 『적지와 왕국』『행복한 죽음』『정의의 사람들ㆍ계엄령』『결혼, 여름』『태양의 후예』『젊은 시절의 글』『스웨덴 연설ㆍ문학 비평』『최초의 인간』『여행일기』『단두대에 대한 성찰ㆍ독일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전락·추방과 왕국』『안과 겉』 등의 작품을 썼다.

출처 : 리디북스


  과거에 읽었던 <이방인>에 이어 유명한 책이라 '언젠가 읽어 봐야지' 하고 묵혀뒀던 책이다. 잊고 살던 와중에 코로나(COVID-19)가 창궐했고, 그 후로도 1년이 더 지났다. 그동안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보고 들었다. 문득, 이제는 더 이상 미루지 말고 이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염병의 유행 속 우리들의 모습은 한 세기 전의 문학 작품이 그려낸 사람들과 어떤 점이 같고 다를까. 그리고 지긋지긋한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어떠한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지 알베르 까뮈의 작품을 통해 알아보고 싶었다.

 

 

 전염병의 창궐로 봉쇄된 도시 속에서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적어낸 책이다. 페스트를 겪으며, 이러한 상황에 대응하는 다양한 인간상의 모습들이 묘사되어 있다.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해내는 의사와 이런 의사를 도우며 페스트와 맞서기 위해 보건대를 조직하는 사람, 자신은 상관없는 일이라며 도시를 탈출하려는 기자와 이런 환경을 이용해 금전을 챙기는 자, 일상을 살며 보잘것없어 보이는 일이라도 필요한 일을 묵묵히 도와주는 자 등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었다.

 

 

 열린세계전집으로 읽으며, 뒷부분에 작품 해설에 대한 흥미로운 내용도 발견할 수 있었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도시 오랑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점령하에 탄압받았던 프랑스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또한, 소설 속에서 페스트에 맞서 결성된 보건대는 레지스탕스 운동을 의미한다고 저자가 언급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나중에 한번 더 읽어봐도 재미있겠다 싶었다.

 

 

 책을 읽으면서 인상 깊게 읽은 부분들이 많았다. 단지 코로나19(COVID19)가 유행하는 현재 상황에 비교하지 않아도, 다가온 위협에 맞서는 사람들의 태도와 재앙을 겪고 나서 우리에게 남는 무언가에 대해서 같은 것들이 특히 기억에 남았다.

 

 

그렇지만 이 점은 반드시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이 모든 일에 영웅주의가 거론될 여지는 없어요. 정직함의 문제죠. 비웃음을 살 수도 있는 생각입니다만, 페스트에 맞서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정직입니다.

  전염병에는 영웅이 아닌 시민들의 정직함으로 맞서야한다는 리유의 의견을 보며 수많은 뉴스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코로나19 감염 후에 자신의 행선지를 숨기고 전염병을 옮기는 데 기여한 자들이 얼마나 많았으며 그들 때문에 퍼진 코로나19로 인한 피해가 얼마나 컸었나 생각해보게 된다. 시민 다수의 정직함으로 방역 수칙이 지켜지고, 전염병에 대한 대응이 수월하게 이루어진다면 우리가 영웅이라 부르는 여러 의료진 및 방역 관계자들의 노고를 덜 수도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한 구절이었다.

 

 

물론 사람이란 희생자들을 위해서 투쟁해야죠. 하지만 더 이상 그 무엇도 사랑하지 않는다면 투쟁은 뭐하러 하는 겁니까?

  이 구절은 자꾸만 생각이 난다. 단지 코로나 시국이여서가 아니다. 이전부터 느껴온 혐오적인 표현의 시대라서 그런가 싶다. 인터넷이나 SNS를 둘러볼수록 혐오를 자주 접한다. 이성을 혐오하고, 세대를 혐오하며, 진영을 혐오하여서 상대측을 모욕하고 벌주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을 본다. 자신을 정의라고 착각하기에 상대를 악으로 규정하고 혐오하는데 망설임이 없다. 그러면 더 나은 사회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결국,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않게 된다면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다투는 것일까. 사람이 어떻게 모범적으로만 살겠나도 싶다. 하지만 과거와는 달리, 잘못이 기록되고 박제된 후 꼬리표로 따라붙는 사회가 된 것 같아 무섭다. 서로의 잘못을 포용하고 사랑할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러한 사랑을 기반으로 더 나은 사회가 되기 위해 투쟁하면 좋겠다. 

 

 

 취준생시기라 힘들고 예민해진 건지, 방역 수칙 위반으로 발생하는 코로나19 대유행 사태를 여러 번 보며 사람을 바라보는 냉소적인 시각이 생기기도 했었다. 특히, 마스크 착용 거부 및 난동 등 소식까지 접하면 인간 자체가 싫어지기도 할 정도였다. 하지만 책의 후반부에서 리유가 말하는 내용을 보며 내 관점의 문제를 고치기 위해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재앙 한가운데서 배우는 것, 즉 인간에게는 경멸보다 감동할 점이 더 많다는 사실만이라도 말하기 위해서 지금 여기서 끝을 맺으려는 이 글을 쓰기로 결심했다.

부정적인 소식을 보느라, 코로나에 대응하는 의료진들과 방역을 위해 불편함을 감수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놓치고 있지 않았나 반성하게 되었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리유의 말이 옳았다. 경멸할 점보다 감동할 점이 더 많았다.

 

 

 이 외에도, 책에서 인상깊게 읽은 구절들에 대한 생각을 덧붙여 적어두려한다.

 

한 명의 사상자란 그가 죽은 걸 우리가 보았을 때야 비로소 중요성을 가지며, 인류의 역사에 걸쳐 뿌려진 1억의 시체들은 그저 상상 속의 한 줄기 연기에 불과하다.

코로나19가 퍼질 당시, 이를 음모론이라며 자신의 주위에는 코로나19에 걸린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말하던 미국 목사의 말이 떠올랐다. 그는 코로나19로 죽었다. 이런 태도는 극단적이지만, 이 말이 적용되는 경우는 수없이 많다. 코로나19 유행시기에 클럽과 술집 앞에 줄 선 사람들과 마스크를 벗고 다니는 사람들에게 코로나 19는 실재하더라도 '자신과 주변에는 없는' 병이지 않았을까.

 

 

사실 재앙만큼이나 별 볼 일 없는 것도 없고, 엄청난 불행이란 그것이 계속된다는 바로 그 이유만으로도 따분하기 때문이다. 그런 불행을 경험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페스트로 인한 끔찍한 하루하루는 모두 다 집어삼켜 버릴 듯 거침없는 기세로 타오르는 거대한 불길과도 같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발밑에 있는 모든 것을 짓이겨 버릴 듯 끊임없이 계속되는 제자리걸음과도 같았다.

코로나19의 영향을 받는 우리의 모습을 잘 표현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영향을 받은 정도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 모두 천천히 코로나19로 바뀐 삶에 지루하고도 지독하게 잠식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서로를 가깝게 하는 따뜻한 인간애를 절실히 원하면서도 동시에 서로를 멀어지게 하는 경계심 때문에 선뜻 나아가지 못한다. 누구든 자기 이웃을 믿을 수 없고,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그 사람이 페스트균을 옮겨서 자신을 감염시킬 수 있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19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시하고 집합을 금지하며 외로움을 느껴본 적이 있지 않을까? 인간의 중요한 특성으로 사회성을 꼽는데, 전염병으로 인해 사회적인 고립이 권장되니 사람을 그리워하면서 두려워하게 된 느낌이다.

 

 

하지만 사람들이란 너무 기다리다 보면 결국엔 더 이상 기대도 하지 않는 법이라, 우리 도시 전체는 미래 없이 살아가고 있었다.

작년 가을 즘이었을 거다. '코로나19가 종식되고 난 후 상황'을 상상하며 그려보는 글이 인터넷에 돌아다닌 적이 있었다. 코로나19가 끝나면 무엇을 하고 싶은지 등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도 종종 보였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말들도 별로 보이지 않는 듯하다. 백신이 나왔지만 변종의 출현과 이에 대한 백신 무력화 소식을 들으면서도 크게 실망하지 않게 되었다.

 

 

이름도 모를 어느 구덩이 속에 내팽개쳐져 있거나, 아니면 유해들의 잿더미 속에 뒤섞여 버린 누군가와 함께 기쁨이란 기쁨은 모조리 잃어버린 그들에게, 그 누군가의 어머니이고 남편이며 연인인 그들에게 페스트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다.

언젠가 코로나19의 종식을 선언하고 마스크를 벗고 생활할 수 있을 미래에도, 소중한 사람을 잃은 사람들에게 코로나19는 지속되는 아픔일 것이란 생각은 미처 못하고 있었다.

 

 


어떤 도시 하나를 아는 데 손쉬운 방법이란 사람들이 그곳에서 어떻게 일하고 어떻게 사랑하며 어떻게 죽는지를 알아보는 것이다.
 그들은 장사를 계속했고, 여행 계획을 세웠으며, 개인적인 견해들이라는 것도 가지고 있었다. 미래며, 여행이며, 토론들을 앗아 가버리는 페스트를 그들이 과연 짐작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그들은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믿고 있었지만, 재앙이 벌어진 이상 그 누구도 결코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한 명의 사상자란 그가 죽은 걸 우리가 보았을 때야 비로소 중요성을 가지며, 인류의 역사에 걸쳐 뿌려진 1억의 시체들은 그저 상상 속의 한 줄기 연기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그들의 첫 번째 반응은 행정 기관을 비난하는 것이었다. 〈적용된 조치들에 대해서 완화책을 강구할 수는 없는가〉와 같이 언론이 증폭시킨 비난 여론을 접한 지사의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결국 사망자의 수가 증가하는 것을 확인하면서야 여론도 사태를 실감했다. 
어떤 카페에서 〈양질의 포도주가 세균을 죽입니다〉라고 내다 걸자, 알코올이 전염병을 예방한다는 생각이 사람들에게 이미 너무나 당연시되던 터라 여론으로 더욱더 굳혀졌다. 매일 새벽 2시경 카페에서 쏟아져 나온 꽤 많은 취객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낙관적인 의견들을 서로 토해 냈다.
코타르는 사실 여부에 상관없이 페스트에 관한 이런저런 소문들을 수없이 많이 알고 있었다.
키 작은 그 남자가 말했다. 「그런데 말이죠, 의사 선생님, 거참 대단한 페스트 아닌가요! 심각해지기 시작하는군요.」 의사는 그렇다고 인정했다. 그러자 상대방은 거의 유쾌하기까지 한 어조로 단언했다. 「여기서 그칠 리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될 거예요.」
일만 하는 남편에, 가난에, 서서히 닫혀만 가는 미래에, 저녁 시간 식탁 주위를 맴도는 침묵에, 이런 세상에 열정이 있을 자리는 없었다. 필시 잔은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자신이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는 채 사람들은 오랜 세월 괴로워하기도 한다. 몇 해가 지났다. 그 후에 그녀는 떠나 버렸다.
랑베르가 아내를 되찾고 서로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다시 모이기를 진심으로 바라지만, 포고와 법령이 있고 페스트가 있으니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은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 불행 속에는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인 부분이 있다. 하지만 추상적인 것이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할 때, 바로 그 추상과 제대로 붙어야 한다.
〈제발 좀 불쌍히 여겨 주세요, 선생님!〉이라는 말을 했었다. 무슨 의미였을까? 의사야 당연히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이 진행되는 것은 아니었다. 전화로 알려야 했다. 그러면 곧이어 구급차의 사이렌이 울려 퍼졌다. 초기에는 이웃 사람들이 창문을 열고 내다보았다. 그러나 나중엔 황급히 닫아 버리는 것이었다. 이어서 옥신각신하고, 눈물을 흘리고, 설득하고, 한마디로 추상이라는 것이 시작되었다. 이렇듯 열병과 불안으로 달아오른 집에서는 광란의 무대가 펼쳐지곤 했다. 아무리 그래도 환자는 결국 끌려갔다.
그들에게 있어 페스트란, 오긴 왔지만 결국엔 떠나가 버릴 불쾌한 손님일 뿐이었다. 두렵긴 하지만 절망에 완전히 빠지지 않은 그들 앞에 페스트가 사느냐 죽느냐라는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그 직전까지 그들이 꾸려 가던 생활을 잊어버리도록 만드는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 시민들 가운데 몇몇 사람들은 실제로 더위와 페스트 때문에 이성을 잃어 이미 폭행을 일삼고 있었고, 급기야 검문소의 감시를 속여 도시 밖으로 도망치려 애쓰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진실에, 다시 말해 침묵에 익숙해지는 때야 말로 바로 불행한 시기다.
「누가 그런 것을 다 가르쳤나요, 선생님?」 대답은 즉각적이었다. 「가난입니다.」
「그런데, 타루 씨.」 그가 말했다. 「뭣 때문에 이런 일에 나서는 겁니까?」 「저도 모르겠어요. 아마도 제가 따르고 싶은 도리 때문이겠죠.」 「어떤 도리 말인가요?」 「이해하려는 마음입니다.」
이 세상의 악이란 거의 대부분 무지에서 비롯되며, 따라서 배움이 없는 선의는 악의와 마찬가지로 피해를 입히는 경우가 있다. 인간이란 악하기보다는 차라리 선하지만 사실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한데,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인간은 덜 무지하거나 더 무지하다. 따라서 우리가 미덕 또는 악덕이라 부르는 것도 바로 그래서이며, 가장 절망적인 악덕이란 전부 다 알고 있다고 믿고 그런 이유로 감히 다른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무지라는 악덕이다.
하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든 자신이 눈으로 볼 수 없는 고통을 진실로 함께 나눌 수 없다는 가혹한 무력감도 동시에 드러내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 점은 반드시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이 모든 일에 영웅주의가 거론될 여지는 없어요. 정직함의 문제죠. 비웃음을 살 수도 있는 생각입니다만, 페스트에 맞서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정직입니다.
그중에서 가장 극심한 것은 이별과 유배의 감정이었으며, 거기에는 공포와 분노가 담겨 있었다.
〈나보다 못한 사람들이 있다니까〉라는 말은 그 당시 가질 수 있었던 유일한 희망을 잘 담고 있다.
먹기 위해서 서류들을 작성해야 하고 절차를 밟아야 하고 줄을 서야 한다는 문제에 온통 정신이 다 나가 버린 사람들은 주위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죽어 가고 있는지, 그리고 자신들이 언젠가 어떻게 죽을지에 대해서 생각해 볼 겨를이 없었다. 그리하여 불행한 일임에 틀림없는 이러한 물질적 어려움이 나중에는 오히려 이로운 일로 여겨졌다.
공동묘지 제일 안쪽으로 향나무들이 들어차 있는 공터에 거대한 구덩이 두 개가 파여 있었다. 하나는 남자용이었고 다른 하나는 여자용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행정 당국은 예법을 존중하고 있었던 셈인데, 훨씬 더 시간이 흐른 뒤 사정이 어쩔 수 없게 되자 이와 같은 마지막 수치심마저도 사라져 버렸다. 체면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남자건 여자건 가리지 않고 뒤죽박죽으로 쌓아 놓고 흙으로 덮어 버렸다.
곧이어 페스트 희생자들마저 화장터로 보내야 했다.
사실 재앙만큼이나 별 볼 일 없는 것도 없고, 엄청난 불행이란 그것이 계속된다는 바로 그 이유만으로도 따분하기 때문이다. 그런 불행을 경험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페스트로 인한 끔찍한 하루하루는 모두 다 집어삼켜 버릴 듯 거침없는 기세로 타오르는 거대한 불길과도 같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발밑에 있는 모든 것을 짓이겨 버릴 듯 끊임없이 계속되는 제자리걸음과도 같았다.
이렇듯 길고 긴 이별의 시간 끝에 그들은 함께 나누었던 그들만의 은밀함도, 언제든 손을 갖다 댈 수 있던 상대가 어떻게 자신들 곁에서 살았었는지도 더 이상 생각해 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재앙에 맞선 이 투쟁을 계속해 나가는 모든 이들을 서서히 잠식하던 극도의 피로가 만든 가장 위험한 결과는 외부 사건이나 다른 사람들의 감정에 대한 이런 무관심이 아니라, 그들이 자신도 모르게 빠져들던 부주의에 있었다.
그들은 서로를 가깝게 하는 따뜻한 인간애를 절실히 원하면서도 동시에 서로를 멀어지게 하는 경계심 때문에 선뜻 나아가지 못한다. 누구든 자기 이웃을 믿을 수 없고,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그 사람이 페스트균을 옮겨서 자신을 감염시킬 수 있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죄 없는 자가 두 눈을 잃었을 때, 기독교 신자라면 신앙을 잃거나 혹은 두 눈을 잃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거죠. 파늘루는 신앙을 잃고 싶지 않은 거고, 그는 끝까지 갈 겁니다. 그가 하려던 말이 바로 이거죠.」
그래서 가난한 가정들은 매우 힘든 상황에 처했고, 반면에 부유한 집안에서는 부족한 것이 거의 없었다. 페스트가 자신의 일에 쏟아붓는 무소불위의 공정함으로 인해서 우리 시민들에게 평등 의식을 고취시켰을 수도 있었겠으나, 이와는 반대로 극단적이고 만성화된 이기주의로 말미암아 사람들 마음속에 부당하다는 감정만을 더욱더 첨예하게 만들었다.
물론 사람이란 희생자들을 위해서 투쟁해야죠. 하지만 더 이상 그 무엇도 사랑하지 않는다면 투쟁은 뭐하러 하는 겁니까?
하지만 사람들이란 너무 기다리다 보면 결국엔 더 이상 기대도 하지 않는 법이라, 우리 도시 전체는 미래 없이 살아가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 마음속에는 너무나 늙고 기력을 다해 버린 희망, 사람들로 하여금 그냥 그대로 죽지도 못하게 만드는 희망, 그저 바보같이 끈질기기만 할 뿐인 그런 희망밖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더욱이 가장 보잘것없는 희망이 실현 가능한 것으로 변모하기 시작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페스트의 실질적인 군림은 이미 끝났다고 말할 수 있었다.
어떤 가정들은 다른 가정들이 환호성으로 가득하던 밤을 침묵 속에서 보냈다. 그러나 이처럼 상중에 있는 많은 사람들의 경우도, 가족들 가운데 누군가를 빼앗기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드디어 사라졌기 때문이건 혹은 자신들 목숨이 위협받고 있지는 않나 하는 위기감에서 벗어났기 때문이건 상관없이, 안도감은 마찬가지로 깊었다고 할 수 있다.
타루는 페스트가 이 도시를 변화시킬 수도 있고 변화시키지 못할 수도 있으며, 시민들이 가장 바라는 바야 물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지금도 또 앞으로도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하며,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테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 보자면, 사람이란 가능한 모든 의지를 발휘한다고 할지라도 전부 다 잊을 수는 없기에 페스트는 적어도 사람들 마음속에 상흔을 남길 것이라 생각한다고 대답했다.
페스트에서 해방된 밤이었다. 그리고 전염병은 추위, 햇빛 그리고 군중에게 쫓겨나 도시의 어둡고 후미진 구석에 간신히 몸을 피해 있다가 이 따뜻한 방으로 숨어 들어와 무기력한 OO의 몸에다 대고 최후의 공격을 퍼부어 대고 있었다.
그와 너무나도 가까웠던 한 인간의 형상이 이렇게 창끝에 찔리고,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악의 불구덩이에서 불태워지고, 하늘이 내린 증오로 가득 찬 바람에 온몸이 꺾이고 휘어져 그가 보는 바로 앞에서 페스트라는 강물에 가라앉고 있었지만, 이 난파를 막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었다. 빈손에 비통한 마음뿐, 무기도 없고 대책도 없이 또다시 이렇듯 참담한 패배 앞에서 그는 그저 강 저편에 그대로 있어야 했다.
OO는 스스로 말했듯이 싸움에서 진 것이었다. 하지만 도대체 리유가 이긴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는 단지 페스트를 경험했고 추억한다는 사실을, 우정을 경험했고 추억한다는 사실을, 인간의 정을 알게 되었고 언젠가는 추억해야 한다는 사실만을 얻었을 뿐이었다. 인간이 페스트와 인생이라는 싸움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은 그것을 깨달았다는 것과 그것을 기억한다는 것뿐이다. 어쩌면 그것이 바로 타루가 말한 바 있었던 싸움에서 이긴다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름도 모를 어느 구덩이 속에 내팽개쳐져 있거나, 아니면 유해들의 잿더미 속에 뒤섞여 버린 누군가와 함께 기쁨이란 기쁨은 모조리 잃어버린 그들에게, 그 누군가의 어머니이고 남편이며 연인인 그들에게 페스트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재앙 한가운데서 배우는 것, 즉 인간에게는 경멸보다 감동할 점이 더 많다는 사실만이라도 말하기 위해서 지금 여기서 끝을 맺으려는 이 글을 쓰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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