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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독후감

[독후감] 살고 싶다는 농담 - 허지웅

by 이윤도 2020. 12. 23.

<살고 싶다는농담> - 허지웅


리디북스 저자 소개
《필름2.0》과 《프리미어》, 《GQ》에서 기자로 일했다. 에세이 『버티는 삶에 관하여』, 『나의 친애하는 적』, 소설 『개포동 김갑수씨의 사정』, 60~80년대 한국 공포영화를 다룬 『망령의 기억』을 썼다.


교보문고에서 접한 이 책 덕분에 허지웅 작가님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전 저서인 <버티는 삶에 관하여>를 사서 읽어보기도 했었다. 역시나 좋았다. 이전 저서는 냉소적인 면이 강했는데, 이번 저서는 좀 더 온화하게 느껴지는 면이 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이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쓰였다는 점은 같다고 느꼈다.


어머니가 암 선고를 받고 보호자로서 수술과 항암 치료, 기타 보조 치료를 함께 다니고 있다. 원자력병원, 분당서울대병원, 고신대병원, 제주대병원... 그래서일까. 에세이에서 허지웅 작가님의 투병기를 읽으며 자꾸만 병원 보호자 침대에서 보고 듣던 많은 것들이 떠올랐다. 보호자임에도 불구하고 힘들었던 그 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어머니가 어떤 것들을 견디시는건지 저자의 글을 읽고 조금이나마 더 이해할 수 있었다. 나만해도 보호자일뿐인데, 병실 천장과 바닥에 질식할 것 같아 종종 넓은 로비에 앉아 심호흡하던 밤들이 떠올랐다. 그래서 저자가 쓴 말들이 위로가 되었고 힘이 되었다.

매일 밤 침대에 누워 잠이 들기 전 그런 생각을 한다. 지금 이 시간에도 누군가 내가 보았던 천장과 바닥을 감당하고 있을 거라고 말이다. 그 어둡고 축축한 구석을 오랫동안 응시하며 정확히 뭐라고 호소해야 할지조차 알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리고 있을 거라고 말이다.
만약 당신이 살기로 결정한다면, 천장과 바닥 사이의 삶을 감당하고 살아내기로 결정한다면, 더 이상 천장에 맺힌 피해의식과 바닥에 깔린 현실이 전과 같은 무게로 당신을 짓누르거나 얼굴을 짓이기지 않을 거라고 약속할 수 있다.



그리고 역시, 담백한 유머는 정말 내 취향이었다. 무심코 툭툭 나오는 문장들에 간간히 웃으며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형과 동생은 사라졌다. 나만 남았다. 누군가가 믿을 만하고 성실한 사람인가 확인해보려면 같이 요가를 해라.
다른 선생님들 말씀으로는 우리 사라 코너가 아쉬탕가 선생님 중에 비교적 온화한 편이라고 한다. 다른 선생님들은 발로 아랫배라도 걷어차는 모양이다.



이전에 저자가 방송에서, 투병시절 유재석에 관한 미담을 말하는 짤을 본 적이 있다. 과거에는 특유의 시니컬한 느낌으로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미담이 가득한지 의구심을 표하던 저자였다. 하지만 투병을 마치고 돌아온 후 '마치 간증을 하는 기분'이라며 유재석에 관한 이야기를 하던 짤이었다. 이에 대한 내용이 이번 에세이에서도 들어있었다. 이 부분을 읽자마자 유재석이 보낸 문자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남의 도움을 받지 않으며 세상을 혼자 돌파하기를 고집하던 저자가 무너져가던 때, 타인의 안부문자 하나로 안정을 얻는 이야기를 보며 우리가 살아가야할 모습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었다.

투병시절, 허지웅 작가의 유재석 관련 미담 짤

정신을 차리고 침대에 앉아 휴대폰을 다시 켰다. 방송을 하면서 알게 되었던 형의 문자가 와 있었다. 그냥 안부 문자였다.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편해졌다. 불과 몇 분 전까지 이길 수 없는 문제들에 함몰되어 포기하고 허우적대고 있었는데 이제는 그냥 일상적인 삶의 궤도 위로 돌아와 있었다. 그런 보통의 감정을 느낀 건 항암을 시작한 이후 처음이었다.



버티어 나가자라고 했던 저자가 자신의 의지로 살기를 결심하라 한다. 이 미묘한 차이가 저자의 투병 전후 달라진 점이 아닐까 싶었다. 전자는 수동적인 면이 강하고, 생존 자체에 무게가 실린다고 느껴지는 반면 후자는 능동적이며 적극적인 삶이 느껴졌다. 전자가 단단하지만 부러지기 쉬워보였다면, 후자는 한없이 흔들려도 꺾이지 않을 것 같았다. 버티는 삶과 살아내기로 결심한 삶, 그 차이를 보며 삶의 태도에 대해 생각해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살기로 결정하라고 말하고 싶다. 죽지 못해 관성과 비탄으로 사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의지에 따라 살기로 결정하라고 말이다.



이전 저서도 그랬지만, 읽기 편한 글에 알찬 사유가 좋았다. 일상 속 경험이나 보고 들어온 것을 깊은 생각으로 발전시키고 글로 풀어내는 능력을 본받고 싶다. 나는 얼마나 생각 없이 살아왔는지 반성하고 있다. 나도 틈틈히 내 삶을 글로 풀어내보자 다짐해본다.



아마 행복이라는 건 삶을 통해 스스로에게 증명해나가는 어떤 것일 테다.
거창한 결론이 삶을 망친다면 사소한 결심들은 동기가 된다.
아무리 덜떨어져도 인사 잘하고 성실하면 중간은 간다. 정작 어릴 때 들었을 때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가 삶을 통해 신뢰하게 된 명제다.
이기는 경험을 쌓으면 패배해도 주저앉아 비관하지 않고 다시 한번, 이라고 말할 수 있다.
스스로 형편이 불리하다고 생각한다면 다른 무엇보다 몸을 이기는 경험을 쌓아나가자. 출발선이 다르고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몸을 이기는 경험을 대신 쌓는 것이다.
전보다 건강하고 전보다 긍정적이며 전보다 무엇을 해야 할지에 관한 확신이 있다. 내가 그날 밤에 겪은 일 때문이 아니다. 살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살기로 결정한다면, 천장과 바닥 사이의 삶을 감당하고 살아내기로 결정한다면, 더 이상 천장에 맺힌 피해의식과 바닥에 깔린 현실이 전과 같은 무게로 당신을 짓누르거나 얼굴을 짓이기지 않을 거라고 약속할 수 있다.
내부의 갈등을 가족이라는 허명으로 덮어 일방적으로 무마하려 하지 않고 해체되었더라도 위기가 닥쳤을 때는 아무런 조건 없이 언제든 다시 찾아와 옆을 지켜주는 게 가족이다. 그게 반평생을 씨줄과 날줄처럼 엮여서 삶을 공유한 사람들 사이에 마땅한 의리다.
많은 이들이 평균의 삶에 자신을 맞추어 살아가고 또 그런 가르침을 자식에게 전수하려 애쓰는 것은 세상이 자신과 다른 것에 얼마나 끔찍하고 폭력적으로 반응하는지에 관해 평생 동안 학습했기 때문일지 모른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적정한 거리감이라는 게 필요하다. 누군가에게는 열 보가 필요하고 누군가에게는 반보가 필요하다. 그보다 더하거나 덜하면 둘 사이를 잇고 있는 다리가 붕괴된다. 인간관계란 그 거리감을 셈하는 일이다.
살아 있는 자가 죽음을 평가하는 건 거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죽음의 내막에 관해 알 수 있는 건 죽은 사람뿐이다.
최근 몇 년 사이 사안에 대해 함께 고민하는 독자보다 그래서 너는 누구 편이냐고 묻거나 마음대로 단정 짓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아졌다.
공동의 선이나 대의를 실현하는 길이라고 판단했을 때 우리는 쉽게 거짓말을 할 수 있다. 나아가 심지어 거짓말이 아니라고 인식한다. 나 자신의 이익을 위한 거짓만이 오직 거짓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선한 마음으로부터 악한 행동이 나올 수 있는가. 그렇다. ‘공동의 선이나 대의’라는 것은 어느 언덕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완전히 달라진다.
국가 폭력은 서로 돕는 자들을 불신하게 만드는 방법으로 공동체를 무너뜨린다.
대부분의 성공에는 운이 따른다. 반면 실패는 악운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실패는 선택에 의해 결정된다. 내가 직면한 실패가 자연스런 결과로서의 실패인지, 혹은 의도에 의한 음모와 배신인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벌어진 일은 벌어진 일이다. 중요한 건 다음이다. 나라는 인간의 형태는 눈앞의 문제에 대처하는 방식을 선택하는 순간 결정되는 것이다.
피해의식은 사람의 영혼을 그 기초부터 파괴한다. 악마는 당신을 망치기 위해 피해의식을 발명했다. 결코 잊어선 안 된다.
결국 우리는 우리가 가진 가장 멋지고 빼어난 것들 덕분이 아니라 언제 했는지도 기억하지 못하는 오래된 선행들 때문에 구원받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니체는 정확히 바로 그 공포에 맞서라고 이야기한다. 모든 것이 영원히 반복된다는 운명론적 공포를 극복하고, 반복되더라도 좋을 만큼 모든 순간에 주체적으로 최선을 다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상관없다고, 이토록 끔찍한 삶이라도 내 것이라고 외치라는 것이다. 나아가 그런 삶을 사랑하라 주문하는 것이다. 니체의 영원회귀는 바로 그 순간 네 삶의 고통과 즐거움 모두를 주인의 자세로 껴안고 긍정하라는 아모르파티와 결합한다.
삶의 가장 기쁜 순간을 반복하기 위해서라면 가장 추악한 순간마저 얼마든지 되풀이하겠다고 결심하는 순간 니체는 차라투스트라가 되어 큰 소리로 외치는 것이다. “그것이 삶이었던가? 좋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바꿀 수 없는 것을 평온하게 받아들이는 은혜와 바꿔야 할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 그리고 이 둘을 분별하는 지혜를 허락하소서. 라인홀드 니부어의 기도문이다.
시키는 대로 주어진 대로 혹은 우리 편이 하라는 대로 따르는 게 아니라 계속해서 생각하고 의심하고 고민하는 태도만이 오직 바꿀 수 없는 것과 바꿔야 할 것을 구별할 수 있는 밝은 눈으로 이어진다. 이 글이 단 한 명의 독자라도 그런 밝은 눈을 가질 수 있도록 이끌 수 있다면 정말 기쁠 것이다.
회복한 이후에 쓴 모든 글이 그랬다. 나와 같은 시행착오를 하지 않기를 바라고 불행하거나 외롭지 않기를 바란다. 안 그래도 상처받을 일투성인 세상에 적어도 자초하는 부분은 없기를 바란다.
밥벌이를 하며 살아남아 세상을 바꿀 주체가 되려면 끝까지 버텨야 한다. 그러니까 가면을 써라.
이런 식으로 너는 죽는다는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그건 마치 내일 비가 온다는 무미건조한 예보와도 같았다.
그런 사람들이 있다. 청년들은 조심해야 한다. 자신이 누군가의 속내를 쉽게 측정할 수 있다거나 특히 순수성과 양심을 평가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을 주의해라. 자신이 속한 진영의 이익을 위해 멋대로 누군가를 천사로, 악마로 단정하고 몰려다니며 소란을 피우는 자들. 우리는 정의롭다며 아무런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자들. 그런 자들을 피하는 것만으로도 삶이 충분히 입체적이고 풍요로워질 수 있다. 피해자는 그냥 피해자다. 착한 피해자도 나쁜 피해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말은 불필요하다. 그런 말을 하는 자에게는 자기 이익에 부합하는 숨은 의도가 반드시 있다.
도처에 불행이 있다. 불행은 발견되는 것이고 행복은 주장되는 것처럼 보인다.
불행으로부터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 누구도 확언할 수 없다. 다만 무엇을 얻게 되든 그것은 불행에 대처하는 방식과 태도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자신에게만 통하는 객관화의 방법이, 사건과 나를 분리시켜주는 방아쇠가 반드시 있다. 여러분은 그걸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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