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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독후감

[독후감] 버티는 삶에 관하여 - 허지웅

by 이윤도 2020. 11. 21.

<버티는 삶에 관하여> - 허지웅


리디북스 저자 소개
저자 허지웅은 영화주간지 『필름 2.0』과 『프리미어』, 월간지 『GQ』에서 기자로 일했다. 소설 『개포동 김갑수씨의 사정』, 60~80년대 한국 공포영화를 다룬 『망령의 기억』을 썼다. 신문과 잡지에 시사, 영화에 관련한 칼럼을 연재해왔다. 방송에 종종 불려나가고 있지만 글을 쓰지 않으면 건달에 불과하다.



올해, 달리기를 즐기는 중에 귀가 심심해 라디오를 들은 적이 있다. <허지웅쇼>를 들었는데 직접 쓴다는 오프닝이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어 듣기 좋았다. 이때부터 작가 허지웅에 대해 관심을 갖고 찾아보았다. 이후 출간된 <살고싶다는 농담>을 교보문고에서 접하고 허지웅 작가님의 전작인 <버티는 삶에 관하여>부터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해왔다. 이전에 찜한 책들만 다 읽고 사야겠다했지만 이러다가 너무 늦을 것 같아서 그냥 지르고 이것부터 읽어보았다. 그렇다. 내가 월정액 전자책 서비스가 아니라 전자책으로 돈을 주고 따로 샀다. 그정도로 읽고 싶었다(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아 어지간하면 월정액 리디셀렉트 책을 본다).


저자가 그동안 작성해 온 글들을 묶어낸 에세이다. 책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가 있는 종류의 책은 아니지만, 허지웅 작가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정말 좋았다. 라디오 <허지웅쇼>의 오프닝에서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듯, 이런 과거 에세이에서도 여러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 개인적인 이야기부터 사회 문제를 논하기까지, 쉽게 읽히는 글과 가볍지 않은 내용에 슬퍼졌다가 웃음짓다가하며 재미있게 읽었다. 담담한 표현으로 자극적이지 않지만 여러 감정을 건드리고 내실있는 사유로 채워진 책이라고 생각한다.


읽으며 너무 다양한 감정을 느껴서 뭐라 적어야할지 막막하다. 저자의 과거 이야기들을 듣다보면 그 마음이 어땠을지 가늠이 안되어서, 때로는 공감해서 눈물이 배어 나왔다. 담백한 표현으로 재밌게 풀어낸 글들을 볼 때면 웃음이 절로 배어 나왔고, 우리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볼 때면 씁쓸했다.


개인적으로 아래와 같은 유머들이 내 취향이었다. 읽다가 오랫동안 웃었다.

누가 고시원 총무 일을 해보면 어떠냐 말했을 때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총무를 하면 방이 공짜다. 심지어 한 달에 20만 원에서 30만 원 가까운 수입이 생긴다. 이미 나는 고시원 생활만 2년째인 경력자가 아니었던가. 내 주위에 이런 고부가가치 산업이 존재해왔다는 사실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친구의 제보로 포경수술을 할 때 상당량의 성감대가 함께 잘려나간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아직 확정적인 데이터를 얻지 못해 미루고 있지만 이게 사실이라면 나는 정말 청와대 앞에 가서 1인 시위라도 할 생각이다. 야 씨발 내 고추 내놔!
총기난사가 메릴린 맨슨 때문이고 게이가 레이디 가가 때문이고 학교폭력이 웹툰 때문이고 연쇄살인이 영화 때문이면 내가 오늘 배탈이 난 건 무엇 때문이냐. 마스터 셰프 코리아?



흔히들 허지웅씨는 냉소적으로 보인다거나, 까칠한 느낌이라는 이야기가 많이 보였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보니 사람들을 위하고 이 사회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길 바라는 따뜻한 사람같았다. 다만, 그 과정에서 한 개인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세상의 풍파를 많이 겪으며 그런 태도를 가지게 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선한 영향력을 가진 글을 쓰는 그 노력이 고맙다. 이런저런 뜬금없는 악플들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생각거리를 던져준다는 것은 <허지웅쇼>를 통해서 알았지만 이번 책을 통해 그의 생각은 오래전부터 진행중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앞으로 꾸준히 저자가 쓴 글을 찾아볼 듯 싶다. 이 책도 여러번 읽어보아야겠다. 가벼움의 문화 속에서 이런 사유를 담은 에세이를 만나니 좋았다.


번외로, 글을 정말 잘 쓰신다. 언젠가 자신의 글쓰기 철학을 말하던 방송인지 글인지..를 본 적이 있다. 그때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이번에 읽으며 느꼈다. 정말 편하게 읽힌다. 내용의 무게와는 별개로 글 자체가 굉장히 읽기 편했다. 덕분에 빠른 속도로, 깊이 읽을 수 있었다.


상처는 상처고 인생은 인생이다. 상처를 과시할 필요도, 자기변명을 위한 핑곗거리로 삼을 이유도 없다. 다만 짊어질 뿐이다. 짊어지고 껴안고 공생하는 방법을 조금씩 터득할 뿐이다. 살아가는 내내 말이다.
엄마는 울고 있었다. 저쪽의 방에선 나와 동갑인 사촌 여자애가 큰 소리로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저 여자 좀 우리집에 오지 말라고 해! 나는 엄마 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리고 신발장으로 끌고 갔다.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는 엄마에게 신을 신기고 나도 일어났다. 그리고 말했다. 작은외삼촌 안녕히 계세요. 내가 왜 그랬을까 지금도 종종 생각해본다.
뉴스를 보다보면 세상의 속살이 드러나 그 추잡함과 헐거움, 촌스러움에 치를 떨게 될 때가 있다. 나는 그게 근본적으로 서로 앞다투어 멋지고 잘났고 괜찮고 근사하고 옳다고 믿는 사람들투성이라 초래된 세상이라고 본다. 그것이 체계 안의 인간이기 때문이든, 태생적 한계이든 간에 관계없이, 모든 인간은 모순적이고 흠결투성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확신한다.
요컨대 지금 시대가 보여주고 있는 불관용의 모습은 스스로의 됨됨이에 관해 지나치게 긍정하는 데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완전무결하지 못한 타인을 과하게 탓하고 자신의 악행은 선량한 자의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여기는 이중성이 팽배해 있다. 스스로 정말 그렇게 믿거나, 혹은 그런 사람으로 보이게끔 가장하고 있는 것일 테다.
내가 별로라는 걸 인지하는 사람은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할 수 있다. 무엇보다 개인의 선량함이나 역량에 의존하는 방식보다 제대로 굴러갈 수 있는 체계가, 시스템이 중요하다는 사실에 더 빨리 가닿을 수 있다. 그건 비관이 아니다. 비전이다.
존경과 권위는 스스로 선배라고 선언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행동과 품위, 아껴 보고 배울 점들로부터 자연스레 얻어지는 것이다.
인간은 과거를 생각할 때마다 조금씩 죽는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로잡힐 과거는 늘어간다. 후회를 남기지 않는 죽음 따위는 근사한 문장 안에서나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마지막 순간, 인간은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멀찌감치 초과해버린 과거의 무게에 눌려 버둥거리며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된다는 건 자기 주변을 책임질 일이 늘어간다는 것이다. 당신도 알다시피 책임을 진다는 건 말처럼 그리 고상한 일이 아니다. 더럽고 치사한 일이다. 내 소신이 아니라 남의 소신을 지켜주어야 하는 일이다.
어쨌거나 세상의 표면 위를 더듬거리고 선 벌거숭이 어린아이에게, 저 혼자 힘으로 벌어 지내는 게 가능한 거주지가 있다는 건 여러모로 든든한 일이다. 그것은 온전히 제어할 수 있는 공간이었고, 분수에 맞는 삶이었다.
주변에서 고시원을 “거기 잠깐 살아봤는데”라며 웃음거리 소재로 삼거나 대단한 고난과 육체적 고통의 기억으로 환기시키면, 그래서 조금 불편하다. 내게 고시원은 그때 그 시절의 뜨거움이 아니다. 그것은 약간의 살냄새가 더해진 삶의 풍경이자, 지금 딛고 서 있는 현실의 연장선이다.
TV만 보면 테이스트가 없는 사람이 되고, 인터넷만 보면 자기가 해보지 않은 모든 것을 불편하게 여기거나 틀렸다고 말하게 되며, 경험만 많이 쌓으면 주변 세계와 격리된 꼰대가 됩니다. 종류가 무엇이든 책을 읽으세요. 가장 오랫동안 검증된 지혜입니다.
나도 안다. 나는 냉소적인 사람이다. 나는 대개 만사가 짜증스럽다. 기부한다고 하면 손뼉을 치다가 기부가 필요 없는 체제를 만들자고 주장하면 빨갱이라 욕하는 알량함이 우습다. 비닐하우스에서 라면 먹고 금메달 딴 이야기가 공동체의 부끄러움이 아닌 미담이 되어, 1등이 되지 못한 다른 모든 이들이 그저 충분히 노력하지 않은 것으로 치부되어버리는 풍경이 꼴사납다.
너무 많은 비관과 냉소는, 때로는 막연하고 뜨거운 주관보다도 되레 진실을 더욱 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일지 모른다. 이 글을 읽을 여러분은 부디 나보다 나은 미감과 연민을 가지고 세상의 진심들과 겨루어주길 바란다.
우습게 들릴지 모르지만 <혹성탈출>의 마지막을 채우는 비밀이 어쩌면 원숭이의 진화가 아니라, 유전 형질상 완전히 분리돼버린 부층과 빈층의 갈등에서 기인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소문과 말과 해프닝과 논쟁이 과격해질수록 진실은 보이지 않게 된다. 사람들을 지치게 만들어라. 적당한 때가 되면, 당신은 어떤 말로든 진실을 꾸며낼 수 있을 것이다.
최소한의 공감하는 능력. 아, 우리는 너무 빠른 속도로 우리의 공감하는 능력을 포기하며 체념하고 있다.
똑같이 수해를 당해도 강남의 수해는 지원도 빠르고 자원봉사도 넘쳐난다. 그러길래 누가 강남 밖에서 수해당하래. 그것이 ‘현실’이라는 것이다.
최소한의 공감하는 능력을 상실하거나 외면한 채로, 우리는 어느 순간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시급하고 묵직한 지상의 문제이며, 진짜 현실이다.
‘선한 우리 편’과 ‘악한 너희 편’을 강제하지 않고선 성립 불가능한 정치권력이란 비열할뿐더러 무능합니다.
집단행위란 거기 가담하는 개인을 익명으로 만들기 때문에 개별의 지분을 축소하는 착시효과를 낳기 마련이다. 스스로 폭력의 주체임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1/N의 폭력이 무서운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애초 내가 지적했던 건 개인이 책임지고 짊어져야 할 사생활의 영역에 과몰입하여 사사로운 정의감으로 욕설을 퍼붓는 자들과 그에 편승한 언론이다.
이토록 교회가 많은 나라에서 나 같은 냉담자마저 기억하고 있는 이야기의 교훈이 쉽게 간과된다는 건 괴상한 노릇이다. 요한복음 8장에 등장하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대목은 이 불행한 여인에게 연민을 가지라는 따위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 대목에서 방점은 ‘먼저’에 찍히는 것이다. 백 개의 돌팔매 안에 돌멩이 하나로 숨어 있을 때는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1/N이라는 익명의 폭력으로부터 빠져나와 자신이 타인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깨달으라는 이야기다. 그것을 알고도 책임질 수 있으면 돌을 던지라는 말이다. 그럴 수 있는가?
세상은 누군가에 대해 한번 내린 판단을 쉽게 뒤집지 않는다. 그것이 왜곡된 진실이라도 마찬가지다. 굳이 헤집어 진실을 따져볼 의지 따윈 드물다.
사람들은 당신의 행복에 관심이 없다. 언론은 당신의 진심에 관심이 없다. 언제나 목적은 더 잘 팔리는 이야깃거리다.
대중은 스타의 열애설을 좋아한다. 그보다 좋아하는 건 스타의 결혼이다. 2세 소식 또한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보다 열 배 정도 더 좋아하는 건 스타의 파경 이야기다. 마약 복용이나 자살 이야기는 훨씬 더 잘 팔린다.
선정적 사건일수록 선정적이지 않게 다루고, 무분별한 판단이 이뤄지지 않도록 정교하게 편집·배열해야 할 책임이 언론에는 있다. 이들은 더이상 언론인이 아닌 보부상처럼 보인다. 나는 언론인들이 오히려 스스로 언론 엘리트라는 자존심 위에서 글을 쓰고 편집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시정잡배 같은 자세로 당장의 광고 한 면과 클릭 수에 연연하는 모습을 보여서는 지금과 같은 불신과 오명을 씻을 길이 없다.
살아 있는 누군가는 깎아내려짐으로써 상품화된다. 이미 죽은 누군가는 신화화됨으로써 상품화된다. 어제 잭슨을 욕해 배를 채웠던 사람들이 오늘 잭슨을 우러러 다시 배를 채운다. 잭슨에 대한 평가는 하루아침에 바뀌었지만, 정작 그를 둘러싼 세계의 동기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진심과 진실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본질에 대한 어떤 규명이나 확인도 없이 괴물은 우상이 되고 우상은 괴물이 된다. 돈이 된다면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세상에서 가장 쉽고 천박하며 공공연한 진실이다.
스타를 공인이라 부르며 사생활을 헤집는 대담함과, 그것을 감수하며 눈물을 떨구거나 거짓말을 하는 스타의 처연함 사이에는 일종의 부채의식과 상환에의 의지가 양쪽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스타에 대한 사이버 테러를 일종의 권리 같은 것으로 오해하는 현상도 이렇게 보면 이해할 만한 사고의 흐름이다. 사채꾼도 돈 받으러 갈 때는 정의롭다.
공정한 사회는 가십의 주인공이나 갖가지 민폐로 입방아에 오른 괘씸한 자들을 단죄하는 방식으로 실현되지 않는다. 공정한 사회는 오로지 더 나은 체계, 즉 우리 삶을 규제하고 관리하는 법과 제도 그 자체를 향한 시민적 요구로만 이루어진다.
여기서 <다이하드>의 구성이 나왔다. 이건 서른다섯 살 먹은 남자가 아내에게 잘못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가 때를 놓치고 후회하는 이야기다.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일들은 대개, 정의의 이름으로 이루어진다.
세계는 폭력적이지만 그 체제는 분명한 안온함을 제공한다. 그것을 벗어난 인간에게 희망이란 가능한 것일까. 요나는 ‘큰 물고기’라는 신의 형벌 안에서 탈출하고 생존했던 인간의 이름이다. 내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나는 <설국열차>가 언젠가 위대한 영화의 리스트 어느 구석에서 반드시 발견될 것이라 생각한다.
자신이 겪어보지 못한 현실이라고 해서 그 현실을 무시할 권리 따윈 누구에게도 없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가족이라는 이름의 코끼리를 기르고 있다. 공공연한 폭력의 최전선은 전쟁터가 아니라 가정이다. 남이 하면 뭐 저런 미친놈이 다 있어, 삿대질할 것도 엄마에게 형제에게 자식에게 남김없이 쏟아낸다.
드라마 서사로서의 절대악이나 절대선은 현실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 정치는 특히 더 그렇다. 다만 자기 입장과 계급 정체성에 맞는, 나와 내 주변의 더 나은 삶을 보장해줄 수 있는 후보를 찍으면 되는 일이다.
우리가 인생의 위기를 극복하고 혹시 모를 성장의 기회를 얻기 위해 끊임없이 경청해야 하는 것은 성공담이 아니라 굴복하고 실패한 이들의 이야기다.
영화의 충격효과로 당장 바뀔 수 있는 나라의 법체계란 얼마나 보잘것없고 애초 부패한 것인가. 이전까지 바로 그 부패한 체계의 일부로 기능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와서 영화 한 편으로 세상이 바뀌고 있다는 의도된 말을 끊임없이 생산해가며 선동의 스펙터클 안에 몸을 숨기고 좀더 요란한 제스처로 분노하는 정치인과 보도매체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바로 여기가 무진이라는 실감을 다시 한번 하게 된다.
<록키>는 지난 세월을 꼰대들과 불화하며 답답하게 보낸 서른 살의 한 남자가 세상의 방식이 아닌 자신만의 방식으로 스스로의 존재가치를 온전하게 증명해내는 이야기다. 그의 해답은 이기든 지든 끝까지 자기 힘으로 버티어내는 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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