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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독후감

[독후감] 절제의 기술 - 스벤 브링크만

by 이윤도 2022. 1. 16.

<절제의 기술> 스벤 브링크만

저자 소개
덴마크 오르후스대학교와 대학원에서 철학과 심리학을 전공했고, 현재 알보그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심리학과 철학, 사회학은 물론 대중문화 전반에 걸친 폭넓은 지식을 바탕으로 활발한 저술 및 강연 활동을 하고 있다. 대표작 『스탠드펌』은 106주 연속 베스트셀러에 올랐으며, 2015년에는 사회에 의미 있는 통찰을 준 대중 지식 지식인에게 수여하는 권위 있는 상인 로젱크예르 상을 수상했다. 이를 계기로 출연한 라디오 방송에서 유쾌한 철학 강의를 진행해 많은 호응을 받았고, 방송 내용을 토대로 쓴 저서 『철학이 필요한 순간』을 펴냈다.

덴마크에서 가장 신뢰받는 대중 철학자이자 심리학자인 그는 『절제의 기술』에서 내려놓는 삶의 즐거움(JOMO)을 다룬다. 남에게 뒤처지고 흐름을 놓치는 게 두려워 유혹만 계속 좇다 보면, 욕망에 휘둘려 결코 행복할 수 없다. 이 책은 절제하는 삶에 필요한 5가지 원칙을 통해 자기 삶의 주인이 되고,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되찾는 법을 명쾌하게 제시한다.



  요즘은 절제에 관한 책이 끌린다. 근래에 다양한 것을 원하고 해내려고 할수록 삶이 복잡하고 피곤하게 다가옴을 느꼈기 때문이다. 필사, 글쓰기, 재즈음악감상, 드라마와 영화감상, 운동, 신학 관련 공부, 취준, 간병, 독서, 이와 관련한 모임들에 관한 관심까지. 기본 뼈대인 취준과 간병에 이런저런 것들을 강박적으로 덧붙이다보니 일상이 바쁘고 혼란스럽게 느껴졌다. 그렇게 지쳐있을 때 <월든>을 읽었고, 내게 필요한 것은 단순한 삶이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서 <월든>에 이어 고른 책이 <절제의 기술>이다.


  사실, 이번 책에 큰 기대는 하지 않았었다. 제목을 보고 흔한 실용서인가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가벼운 책은 아니었다. 심리학, 철학 , 윤리학, 정치학, 미학이라는 5가지 관점을 통해 절체의 가치를 살펴보며 내가 가지고 있던 절제의 의미를 확장할 수 있었다.

이 책은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데서, 탐욕이 아니라 결핍에서 의미를 창조한다.



  '절제'라고 하면 우리가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이미지가 있다. 가지고 싶은 물건을 사지 않고, 먹고싶은 것을 먹지 않으며 하고 싶은 것을 하지 않는 정도의 금욕적인 모습 말이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 욕망을 창조하고 유도하는 소비사회에서 개인의 행복과 사회적 책임 의식까지 다방면에서 긍정적인 작용을 하는 절제의 가치를 알 수 있었다.


  나는 실존주의자에 가까웠다. 행동이 개인을 나타낸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하지 않음'으로서도 자신을 표현하고 있다는 내용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나는 무엇을 해내는 사람인가라는 질문에 가려져 있던 무엇을 하지 않는 사람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실존주의자들은 한 개인이 누구인지는 그가 하는 행동이 말해준다고 주장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우리는 우리가 ‘하지 않는’ 것에도 달려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하는 것만이 아니라, 기꺼이 놓아버리는 것들 역시 우리라는 사람을 만든다. 무언가를 기꺼이 내려놓을 때, 비로소 삶은 틀을 얻는다.



  절제라고 하면 거부감을 갖는 현대인들이 많을 것 같다. 나도 이 책을 읽기 전에 우려한 부분이기도 하다. 떠오르는 이미지가 금욕적인 측면이 없지 않아 있다. 우리가 왜 절제해야 하는가? 왜 원하는 것과 즐기고 싶은 것을 굳이 참아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저자는 절제의 가치가 개인과 집단, 사회에 미칠 긍정적 영향을 논하며 이러한 의문을 잘 해결해주었다. 물론, 절제의 긍정적 영향이라는 것이 단순히 '이득'이 되기 때문에 권해지는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한다.

절제의 기술은 실존적이며 윤리적으로 중요한 상황에서 의미를 가진다. 이러한 가치와 연결되지 않은 절제는 개인의 눈먼 자기 충족 수단으로 축소되기 쉽다. 순전히 기회주의적이거나 도구적인 자기계발 도구가 되기 쉽다는 말이다.

 

 

  물론, 더 많이 경험하고 갖고 성취하라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저자는 이에 대해 '옳은 것을 욕망하라'고 말한다. 절제 또한 절제해야하며, 욕망의 결핍이 과잉보다 나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러니 우리는 진정으로 옳은 것을 원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 자체가 이득이 되어서 욕망하는 것이 아니고, 손실이 있기 때문에 피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진정 바라는 가치를 찾아야 한다. 곰곰히 생각해볼수록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 우리는 합리적이기만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돈을 좇는 이유도 그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줄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좇는 것이 행복이라면, 진정 마음을 쓰고 싶은 무언가를 바라야한다는 말에 나는 무엇에 마음을 쓰고 싶은지 생각해볼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절제도 지나치면 해롭다. 절제가 신성불가침 원칙이나 금욕이 되면 절제하는 사람 자신뿐 아니라 주변 사람에게도 견디기 힘든 일이 되고 만다. 그러니 절제도 절제해야 한다는 것을 늘 기억하자!
마음의 순결함은 단 한 가지만 바라는 것이다. 무언가 이익이나 보답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마음 쓰는 것이 그 자체로 가치 있기에 바라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가 그 자체로 가치 있는 무언가를 바랄 때, 그 대상은 그 자체로 온전한 한 가지가 된다.
한 가지만 바라는 일에는 늘 실망과 좌절의 위험이 뒤따른다. 한 가지만 바라는 길의 어디쯤에선가 우리는 실패를 경험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그런 마음에는 기꺼이 위험을 무릅쓸 가치가 있다.



  절제의 가치를 개인적인 의미에서 사회적인 의미까지 넓혀준 것이 특히 중요한 내용이었다고 생각한다. 지속가능한 사회라는 말을 다들 들어는 봤을 것이다.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후변화를 직접 마주하고 있는 현재, 우리는 남은 우리의 삶뿐만 아니라 후손들을 위해서도 절제해야한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 아래 일회용품을 줄이기 위해 권장되던 텀블러가 수집용품으로 변질되고, 친환경 컨셉의 다양한 브랜드들 또한 수집용으로 그 의도가 왜곡되어 소비되는 현상은 슬픈 일이다. 친환경이라는 이미지조차 욕망과 소비의 대상으로 전락한 현재 상황을 생각하니 절제를 행하는 데 있어 깊은 사고의 중요성을 더욱 느낄 수 있었다. 매번 수집의 대상이 되는 스타벅스 MD나 예쁜 무늬를 모으겠다며 필요하지 않아도 구매하는 프라이탁같은 브랜드가 떠올라 씁쓸했다.

주로 윤리적, 심리학적 목소리로 우리가 절제의 기술을 배우지 못한다면 끝내 파멸할 것이라 말한다. 이제 여기에 다른 목소리까지 합류하고 있다. 바로 지속 가능한 사회를 위해 환경적, 정치적 측면에서 절제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다.
어쩌면 우리 눈앞에 닥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우리가 지니고 있던 오래된 덕을 집단적인 차원에서 재발견하는 일이 아닐까? 바로 절제의 기술 말이다.



  책을 읽으며 저번에 읽었던 책 <월든>이 떠오를 수 밖에 없었다. 저자가 논한 내용이 <월든>의 저자를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그리고 <월든>을 읽을 때와 비슷하게 편안한 마음을 이 책에서도 느꼈다. 공통점은 절제의 가치에 있었다. 절제를 통한 단순한 삶 속에서 발견하는 진실한 삶. 덜 욕망한다면 느낄 수 있을 소소한 행복을 우리가 놓치며 살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볼 수 있았다.

19세기 중반, 미국 매사추세츠주 콩코드 월든 호숫가에 작은 오두막을 짓고 소박한 삶을 실험했던 헨리 데이비드 소로도 단순한 삶을 옹호한 사람 가운데 하나다. 그 역시 우리가 잘 살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은 매우 적은 데도, 사람들은 계속해서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혹사한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절제함으로서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저자의 말에 머리를 한대 맞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렇다. 욕망의 노예가 되지않음으로서 우리는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을 조절할 능력을 갖추면,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다. 유튜브나 넷플릭스를 보다가 해야할 일을 미루고 나중에 후회하던 내 모습이 떠오르는 부분이었다. 

이득이 되든 안 되든 관계없이, 선을 추구하는 일에는 그 자체로 해방적인 측면도 있다. 욕망을 최대한 실현하겠다는 야망은 우리를 자유롭게 만들지 못한다. 욕망의 노예로 전락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정으로 자유로워지고 싶다면 불필요한 욕망을 절제하고, 기꺼이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한다. 전부 붙들고 다 이루려고 애쓰느라 정작 중요한 게 뭔지도 모르게 되거나, 틀 없는 삶 속에서 욕망에 휘둘리고 이리저리 방황하며 사는 대신, 정말 가치 있고 중요한 단 한 가지에 마음을 쓸 줄 알아야 한다.
자기 충동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능력만큼, 그리고 우리 자신의 가치를 비롯한 여러 관점에서 충동을 따를지 억제할지 올바르게 결정을 내리는 능력만큼의 자유의지를 갖게 된다.

 

 

  독후감을 썼지만, 책의 내용을 만족스럽게 담아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많은 생각을 했고, 깊게 생각하며 읽을 거리가 많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이다. 이번 책이 흥미로워서 저자의 또 이전 책들인 <스탠드펌>이나 <철학이 필요한 순간> 등을 찾아 읽어볼까하는 마음도 들었다. 당장 담아놓은 책들이 많아 언제 읽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우리는 더 많은 경험을 하는 데 많은 시간을 쏟아붓고 있다. 그러나 ‘안 돼’, ‘이제 그만’이라고 말하는 능력, 어떤 일을 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능력, 다시 말해 절제의 기술을 얻기 위한 노력은 거의 하지 않는다. 개인으로서나 사회 전체로서나 이런 기술이 부족하다.
자학이나 금욕은 ‘안 돼’라고 말하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다. 하지만 이 책에서 말하는 자기 절제는 우리가 마주한 현실을 토대로, 어깨에 놓인 책임을 기꺼이 짊어진 채 최선의 삶을 살아내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절제의 기술은 실존적이며 윤리적으로 중요한 상황에서 의미를 가진다. 이러한 가치와 연결되지 않은 절제는 개인의 눈먼 자기 충족 수단으로 축소되기 쉽다. 순전히 기회주의적이거나 도구적인 자기계발 도구가 되기 쉽다는 말이다.
이쯤에서 한 가지 언급하고 넘어갈 것이 있다. 이 세상에는 더 많이 원해도 되는 사람들도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절제에 대해 말할 때, 엘리트주의의 덫에 빠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매일 16킬로미터씩 걸어서 출퇴근하던 사람이 더 나은 삶을 위해 자전거를 원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하지만 나처럼 이미 물질적으로 충분히 풍요로운 덴마크 사람이 겨울용 경주 자전거와 여름용 경주 자전거를 산 뒤 세 번째 경주 자전거를 갖길 꿈꾸는 것은 지나친 것이다. 이 둘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절제는 계속해서 쾌락 쳇바퀴를 달리는 행위, 새로운 쾌락을 끊임없이 찾아다니는 행동을 멈추는 데 쓰여야 한다.
내가 『철학이 필요한 순간』에서 다룬 것처럼 행복은 누구에게도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상태가 아니라, 우리 주변의 타인들에게 올바르게 매여 있는 상태다.
모든 사람에게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경험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환상을 퍼트리는 일이다. 이러한 환상은 불평등의 희생자들에게 오히려 그 책임을 전가한다.
인간의 욕망과 욕구를 완벽하게 채울 수 없다는 생각은 심리학은 물론 철학의 역사에서도 가장 오래된 통찰이다.
우리의 삶에 형태를 부여하는 일에는 실존적인 기술이 필요하다. 우리가 선택한 일에만 마음을 쓰고, 다른 중요하지 않은 일은 기꺼이 내려놓을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논리적으로 생각해보자. 우리 삶이 하나의 형태를 띤다면, 동시에 완전히 다른 형태가 될 수 없다는 건 너무나도 당연하다.
한 가지만 바라는 일에는 늘 실망과 좌절의 위험이 뒤따른다. 한 가지만 바라는 길의 어디쯤에선가 우리는 실패를 경험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그런 마음에는 기꺼이 위험을 무릅쓸 가치가 있다.
만약 배우자에게 배신을 당했다면, 우리는 그와의 결혼 생활 내내 속기만 한 걸까? 키르케고르라면 우리를 위로하며 그렇지 않다고 말할 것이다. 관계에서 진정 선을 바랐다면, 대상이 사라진다고 해도 그 선의 가치는 여전히 유효하다. 비록 실망하고 좌절했을지라도 말이다. 그동안 우리에게 다가왔던 온갖 유혹과 또 다른 사랑의 기회들을 스스로 과감히 포기함으로써 우리는 자신을 상처에 노출했다. 동시에 그렇게 함으로써 그 사랑을 유일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었다.
키르케고르는 더 많은 흥미와 쾌락을 경험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심미적 삶의 형식은 절망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때 삶이란 그저 즐거운 경험만 찾아다니는 긴 여정으로 전락하고, 단 한 가지가 아니라 모든 것을 시도하기에 특별한 틀이 없는 삶을 살게 된다. 앞에서도 살펴보았듯, 아무런 틀이 없는 삶은 결코 자유롭고 행복한 삶이 아니다. 우리가 의미 있게 여기는 가치들인 사랑, 우정, 성취감 등에는 모두 일정한 틀이 있고, 우리는 그 틀 속에서 행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무런 틀도 갖지 못하고 계속해서 눈앞의 욕망만 좇게 된다면, 결국은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원하는 것을 성취하지 못해서 생기는 실망보다 욕망의 결핍이 더 나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옳은 것을 이루려 욕망하는 일이 더더욱 중요해진다.
실존주의자들은 한 개인이 누구인지는 그가 하는 행동이 말해준다고 주장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우리는 우리가 ‘하지 않는’ 것에도 달려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하는 것만이 아니라, 기꺼이 놓아버리는 것들 역시 우리라는 사람을 만든다. 무언가를 기꺼이 내려놓을 때, 비로소 삶은 틀을 얻는다.
이득이 되든 안 되든 관계없이, 선을 추구하는 일에는 그 자체로 해방적인 측면도 있다. 욕망을 최대한 실현하겠다는 야망은 우리를 자유롭게 만들지 못한다. 욕망의 노예로 전락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정으로 자유로워지고 싶다면 불필요한 욕망을 절제하고, 기꺼이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한다. 전부 붙들고 다 이루려고 애쓰느라 정작 중요한 게 뭔지도 모르게 되거나, 틀 없는 삶 속에서 욕망에 휘둘리고 이리저리 방황하며 사는 대신, 정말 가치 있고 중요한 단 한 가지에 마음을 쓸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침묵의 기술을 배워야 하는 이유는 우리에게 말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언어가 없다면 침묵을 배울 이유가 없다.
키르케고르는 “말하는 능력은 덕이기 때문에” 우리의 고통은 말하는 능력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침묵하지 못하는 무능력”에서 나온다고 보았다.
우리는 자기 충동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능력만큼, 그리고 우리 자신의 가치를 비롯한 여러 관점에서 충동을 따를지 억제할지 올바르게 결정을 내리는 능력만큼의 자유의지를 갖게 된다.
하지만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절제도 지나치면 해롭다. 절제가 신성불가침 원칙이나 금욕이 되면 절제하는 사람 자신뿐 아니라 주변 사람에게도 견디기 힘든 일이 되고 만다. 그러니 절제도 절제해야 한다는 것을 늘 기억하자!
브레이크 없고 멈춰 세울 수 없는 자기계발 문화 속에서 개인의 행복은 크게 위협받는다. 어느 모로 보나 지속할 수 없는 문화다.
주로 윤리적, 심리학적 목소리로 우리가 절제의 기술을 배우지 못한다면 끝내 파멸할 것이라 말한다. 이제 여기에 다른 목소리까지 합류하고 있다. 바로 지속 가능한 사회를 위해 환경적, 정치적 측면에서 절제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다.
어떤 흐름에 내가 뒤처질지 모른다고, 기회를 놓칠지 모른다고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어떤 흐름에서 뒤처지고 마음을 내려놓다 보면, 지금 이미 가지고 있는 것들의 진정한 가치를 깨닫게 된다.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것보다 적게 가지는 것에 만족하려면 성숙하고 잘 다듬어진 정신이 필요하다. 손만 뻗으면 거뜬히 붙잡을 수 있는 것들을 기꺼이 놓아버리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과거의 자본주의 시스템이 효율성과 신뢰성을 중시하며 상품 생산을 중심으로 굴러갔다면, 현대의 소비자본주의는 인간의 욕구와 욕망 자체를 생산해낸다. 물론 사람들에게는 항상 욕구가 있었다. 그러나 과거의 경제가 그저 사람들에게 있던 욕구를 충족하려 했던 반면에, 요즘에는 새로운 욕구를 창조해낸다.
삶에서 정말 의미 있는 일이 무엇인지 찾을 수 있다면, 우리는 그런 일에 집중하는 동안 의미 없는 일들은 쉽게 무시할 수 있다. 문제는 무엇이 삶에서 정말 의미 있는지 성찰할 기회조차 드물다는 것이다. 이런 질문을 토론하고 성찰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자유는 연대 의식도 포함한다. 사실 연대 의식이야말로 이 책에서 다루는 주요 주제다. 절제의 기술은 더 힘든 상황에 있는 다른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내 앞에 놓인 무언가를 기쁘게 내려놓는 마음이다. 누구도 단 하나도 포기하려 들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은 그저 개인과 개인의 지난한 투쟁의 장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럴 때 자유는 오직 강자의 전유물이 된다. 어찌 보면 자유와 강제 사이의 딜레마가 모든 교육의 핵심이다. ‘자유’로울 능력을 익히기 위해 우리는 교육을 ‘강제’받을 필요가 있다. 정치적 문제를 토론할 때마다 이 점을 늘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내려놓는 일과 뒤처지는 일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단순한 삶에 즐거움을 느끼고 좋은 삶을 사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시인 로버트 프루스트가 「가지 않은 길」에서 노래한 것처럼,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든 필연적으로 다른 무언가를 놓치기 마련이다. 그러니 두 갈래 길을 동시에 다 걷겠다고 애쓰는 건 헛수고다.
마지막으로 일곱째, 한계와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라. 이 충고야말로 내가 절제와 관련해 말하고 싶은 핵심이기도 하다. 슈워츠의 요지이기도 한데, 이 말은 인간에게 자기 자신을 훈육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개인들에게 자기 앞날을 위해 마시멜로를 쌓아두라고 가르치는 대신, 주변 사람과 마시멜로를 나누어 갖는 행동을 권장하고 보상을 해줘야 한다. 이런 양육 방식은 그때그때 이익에 따라 행동하는 기회주의와는 정반대의 것이다.
우리 삶에서 우연의 비중이 생각보다 훨씬 크다는 사실도 깨달아야 한다. 모든 이가 자기 운명의 주인이며 마음만 먹으면 ‘내가 원하는 것은 언제든 전부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이런 생각은 결코 만족을 모를 자기계발과 최대 성과의 철학을 바탕으로 한다. 그리고 결과가 틀어지면 그 책임을 전부 다 개인에게 돌리는 방향으로 이어진다.
절제의 기술을 배우는 일은 단지 공허한 금욕주의를 연습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모두 충분히 행복과 여유를 누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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