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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독후감

[독후감] 월든 - 헨리 데이비드 소로

by 이윤도 2022. 1. 3.
<월든> 헨리 데이비드 소로

저자 소개
저자 - 헨리 데이비드 소로
1817년 매사추세츠 주 콩코드에서 태어났다. 자신을 ‘신비주의자, 초절주의자, 자연철학자’로 묘사한 소로는 극단적인 개인주의와 단순하고 금욕적인 삶에 대한 선호, 사회와 정부에 대한 개인의 저항 정신으로 잘 알려져 있다. 소로는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고 형과 함께 사립학교를 열어 잠시 교사 생활을 한 뒤 목수, 석공, 조경, 토지측량, 강연에 이르기까지 시간제로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산책하고 독서하고 글 쓰는 데 할애하며 보냈다. 그리고 저명한 문필가이자 사상가 랄프 왈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 집에서 머무르며 가정 교사 생활도 하고 잡지에 글을 기고하기도 하면서 지냈다. 그러다가 1845년 3월부터 월든 호숫가에 오두막집을 짓기 시작하여, 같은 해 7월부터 1847년 9월까지 그곳에서 홀로 지냈다. '숲속의 생활'(Life in the Woods)이라는 제목으로도 불리는 『월든』(Walden)은 바로 월든 호숫가에서 보낸 2년의 삶을 소로우 자신이 기록한 책이다.

소로우가 명실상부한 자연주자라는 사실은 『월든』에서 더 없이 분명해진다. 단순히 호숫가 오두막에서의 생활을 기록해 놓은 것이 아니라, 자연과 깊이 교감하면서 생각하고 느끼고 깨달은 것들을 솔직하게 적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글을 보면, 그가 호수 표면의 잔잔한 움직임에서 크나큰 아름다움과 감동을 느꼈음을 알 수 있다.

'물은 새로운 생명과 움직임을 끊임없이 공중에서 받아들이고 있다. 물은 그 본질상 땅과 하늘의 중간이다. 땅에서는 풀과 나무만이 나부끼지만, 물은 바람이 불면 몸소 잔물결을 일으킨다. 나는 미풍이 물 위를 스쳐 가는 곳을 빛줄기나 빛의 파편이 반짝이는 것을 보고 안다. 이처럼 우리가 수면을 내려다볼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월든』 중에서)


부당한 시민 정부에 대한 합법적인 개인의 저항을 주장한 에세이 『시민 불복종』(1849)은 1846년 7월 멕시코 전쟁에 반대하여 인두세 납부를 거부하여 투옥을 당한 경험을 생생히 그리면서 노예 해방과 전쟁 반대의 신념을 밝힌 역작이다. 20세기 마하트마 간디의 인도 독립운동 및 마틴 루터 킹의 흑인 민권운동에 영감을 준 것으로 유명하다.
멕시코 전쟁과 노예제도에 반대하여 인두세(人頭稅) 납부를 거부했던 소로우는, 이 때문에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다음날 석방되기도 했다. 1859년에는 노예제도 폐지 운동가 존 브라운을 위해 의회에 탄원서를 제출하는 등 노예제 폐지 운동에 헌신하며 활발한 강연과 저술 활동을 펼치다 1862년 콩코드에서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저서에 『콩코드 강과 메리맥 강에서 보낸 일주일』(1849), 『소풍』(1863), 『메인 숲』(1864)이 있다.

역자 - 이덕형
역자 이덕형은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영어교육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이화여고, 동성고등학교, 서울사대 부속고등학교 교사를 역임한 후, 서울대학교 강사와 연세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편저로 《한 권으로 읽는 세계문학 60선》을 비롯 옮긴 책으로는 《가시나무새》(콜린 맥컬로), 《호밀밭의 파수꾼》(J. D. 샐린저), 《페이터의 산문》, 《르네상스》(월터 페이퍼), 《센토》, 《돌아온 토끼》(존 업다이크), 《멋진 신세계》(올더스 헉슬리), 《프랑스 중위의 여자》(존 파울스), 《20세기 아이의 고백》(토머스 로저스), 《가든파티》(캐서린 맨스필드), 《천형》(그레엄 그린), 《여기는 모스크바》(유리 다니엘), 《밤비》(펠릭스 잘텐), 《이솝우화》(이솝) 외에 다수가 있다.



<월든>은 유명한 책이다. 옛날부터 알기는 알았다. 하지만 읽지는 않아왔다. 유명한 작품들이야 워낙 많지 않나. 그런데 네이버 웹툰 <꿈의 기업>에서 이 책이 나온 것을 보았다. 기술이 발전한 시대적 배경에서, 기술의 폐해를 예견한 개발자가 자연 속에서 생활하며 인간을 위한 A.I를 개발할 때 읽었던 책이었다. 자연인으로 산 기록이라기에는 워낙 유명한데다 웹툰에까지 나오니, 읽어봐야겠다 싶어서 집어들었다. <월든>을 가볍게 주워 들었을 때에는 자연에서 소박하게 산 기록을 담은 에세이정도 되는 줄 알았지만 그런 가벼운 책이 아니었음을 이번 독서를 통해 알게 되었다.



독후감을 쓰는 지금, 어떻게 써야할지 감이 잘 잡히지 않는다. 일단 막 써야겠다. 읽으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소로는 인생을 제대로 살아보기 위해 호수 옆에 오두막을 지어 2년을 보냈다. 단지 자연이 그리워서, 자연인으로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제대로 살아보기 위해서였다. 소로는 2년여 간 자연을 관찰하고 사색하며 지냈다.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생각을 하며 노동에 묶인 삶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전체적으로 자신의 안에서 풍요를 찾고 즐기는 저자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나는 인생을 깊이 살고 인생의 골수까지 빼먹기를 원했으며, 강인하게 스파르타인들처럼 살아서 삶이 아닌 것은 모두 파괴하기를 원했다.



소로에 대한 비판적 시각도 존재한다. 저자가 살았던 호수 인근 부지는 지인의 도움으로 이용할 수 있었던 것이며, 실제로는 소박하다고 볼 수 없는 비용을 투자해야 그렇게 살 수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자본주의적 분석보다 저자의 생각에 중점을 두고 읽었다. 자본주의적 배경 위에서 발전해 온 21세기에, 그의 생각이 갖는 의미를 한번 새겨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풍족해지면서도 복잡해지는 시대에 법정 스님의 <무소유>와 '미니멀리즘' 등이 많은 관심을 받았던 이유가 소로의 생각과 통한다고 생각했다.

  물건의 가치란 당장에 또는 장차 그 물건과 교환해야 할 ‘삶의 양’을 말한다.  
간소하게, 간소하게, 그리고 또 간소하게 살아야 된다는 것을 명심하라! 자신의 일을 백이나 천 가지가 아니라 두세 가지로 줄여라. 백만 대신 대여섯만 세고 계산은 엄지손톱 위에 적어두어라.
인간은 이제 자신들이 쓰는 도구의 도구가 되어버렸다.



생산성과 효율성을 따지며 쫓기듯 살아가고, 관심을 가질만한 것들이 넘쳐냐는 시대라서 소로의 말들이 더욱 깊게 다가온 것 같다. 특히, 언젠가 SNS의 유행과 함께 청소년 정신 건강이 과거에 비해 나빠졌다는 이야기를 본 적이 있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인 <소셜 딜레마>에 나온 내용이었다. 중독되도록 설계된 SNS를 이용하며 집중력이 약해지고, 남의 시선을 의식하며 남과 자신을 비교하느라 정신 건강이 악화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기술의 발전과 그로 인한 폐해를 보고, 겪어본 입장으로서 소로의 말에 더욱 공감할 수 있었다.

https://mobile.hidoc.co.kr/healthstory/news/C0000592535
  남들의 평판은 우리 스스로가 자신에 대해 내리는 평가에 비하면 허약한 폭군에 불과하다.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은 그 인간의 운명을 결정한다. 아니 그의 운명을 시사한다.  



그리고 문득 소로의 말에서 <멋진 신세계>가 약간 떠오른 부분도 있었다. 우리의 발명품들이 진지한 일에서 우리의 관심을 빼앗아간다는 말이었다. 요즘 SNS나 동영상 플랫폼 등 기술기업에겐 사람들의 관심이 곧 돈이다. 조회 수를 높이거나 체류 시간을 길게 하기 위해 설계되고 활용되는 기술들 앞에서 우리는 일반적으로 중요하다고 여겼던 능력의 쇠퇴를 맞고 있는 듯 하다. 특히 요즘은 젊은 세대로 갈수록 약해지는 문해력이 이슈가 되고 있다. 이런 현상이 앞으로 변화해가는 세상에서 적용될 또 다른 능력의 출현인지, 아니면 우리가 자극적인 것에 눈을 판 틈을 타 이뤄진 쇠퇴인지는 나중에 알 수 있겠지만 말이다.

  우리의 발명품들은 진지한 일에서 우리의 관심을 빼앗아가는 예쁜 장난감 노릇을 하기 쉽다.  



무언가에 쫓기듯 살게되는 현대 한국 사회에서 심리적 여유를 강조하고 사색을 통한 초연한 삶을 권하는 소로의 말은 나에게 위로가 되었다. 자극적인 온라인 컨텐츠에 함몰되어 실재하는 오프라인 세상을 느긋하게 즐기지 못하는 과거의 모습은 유현준 교수님의 인터뷰가 떠오르기도 했다.

  당시 나는 참으로 부유했다. 금전상으로가 아니라 밝은 시간과 여름날들을 풍성하게 가졌다는 의미에서 부자였다. 나는 그것들을 아낌없이 썼다. 그런 시간들을 작업장이나 교사의 교단에서 좀 더 보내지 않은 것에 대해 나는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유현준 교수, 중앙일보와 인터뷰 중 일부
  미래라든가 가능성이라는 견지에서 볼 때 우리는 우리 앞길에 대해서는 느긋하면서 한계를 긋지 않은 채로 살아가야 하며, 그쪽에다 비치는 우리의 윤곽은 희미하고 애매하게 남겨두어야 할 것이다.  
  사색을 통해 우리는 건전한 의미에서 자기 자신을 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의식적인 마음의 노력으로 우리는 행위들과 그 결과로부터 초연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모든 일이 격류처럼 우리 곁을 지나쳐가는 것이다.  



<월든>을 읽어보기는 한건지 모르겠지만, 저자를 두고 '패배자의 도피'같이 느껴져서 싫다는 독서가를 본 적이 있다. 이런 자본주의적 관점은 보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피곤했다. 이들에게 승리자란 어떤 것일까? 과거에 읽은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언급된 '상처받은 승리자'가 떠올랐다. 무한 경쟁과 격변의 시대, 누가 패배하고 도대체 누가 승리한걸까. 나는 <월든>이 욕심없이 살라는 말 보다는, 제대로 살라는 말로 받아들였다. 자신 안에 중심이 서있는 삶을 살라는 듯이 느껴졌다.


나는 이런 류의 책이 조급해진 마음에 위로가 되는 것 같다. 물론, 초월주의니 뭐니하며 저자의 사상과 얽힌 이야기들까지 파들어가면 위로보단 숙제하는 느낌이 들겠지만 말이다. 내면의 중심을 잡고 심적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삶을 살려고 노력한 저자가 매력적인 책이었다.

  당신의 삶이 아무리 비천하더라도 당당히 맞이하여 살아라. 그 삶을 회피하거나 거기다 대고 욕하지 마라. 그런 삶도 당신 자신만큼 나쁘지는 않은 것이다. 당신이 가장 부유할 때 당신의 삶은 가장 빈곤하게 보인다. 흠을 잡는 사람은 천국에서도 흠을 잡을 것이다. 당신의 삶이 빈곤하더라도 그것을 사랑하라. 당신이 비록 구빈원 신세를 지고 있더라도 그곳에서 유쾌하고 고무적인 멋진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지는 해는 부자의 저택이나 마찬가지로 양로원 창에도 밝게 비친다. 봄이 오면 양로원 문 앞의 눈도 녹는다. 인생을 차분하게 바라보는 사람은 그런 곳에 살더라도 마치 궁전에 사는 것처럼 만족한 마음과 유쾌한 생각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노고는 잘못된 생각에서 생겨난다. 인간 육신의 대부분은 곧 흙 속에 묻혀 퇴비로 변한다. 그러나 인간들은 흔히 필요라고 불리는 허울 좋은 운명을 믿고, 한 옛날 책에 나오는 말처럼 좀과 녹이 슬며 도둑들이 들어와 훔쳐갈 재물을 모으느라 여념이 없다. 이것은 바보의 일생이다. 이 사실을 처음에는 모르겠지만 삶이 끝날 무렵에는 바보들도 알 것이다.  
남들의 평판은 우리 스스로가 자신에 대해 내리는 평가에 비하면 허약한 폭군에 불과하다.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은 그 인간의 운명을 결정한다. 아니 그의 운명을 시사한다.
  사치품과 편의품에 관해 말하건대 가장 현명한 사람들은 항상 가난한 사람들보다 더 소박하고 결핍된 생활을 영위했다. 중국, 인도, 페르시아, 그리스 등의 옛 철학자들은 겉으로는 누구보다 가난했으나 내적으로는 가장 부유한 사람들이었다.  
  사람들이 칭찬하고 성공한 것으로 생각하는 인생은 여러 가지 삶 가운데 한 가지에 불과하다. 왜 다른 여러 인생을 희생하면서 하나의 인생을 과대평가하는 것일까?  
  옷을 웃음거리가 되지 않게 하고 성스럽게 하는 것은 오로지 그 옷을 입은 사람의 반짝이는 진지한 눈빛과 성실한 삶이다.  
물건의 가치란 당장에 또는 장차 그 물건과 교환해야 할 ‘삶의 양’을 말한다.
나는 내 책상 위에 세 개의 석회석을 놓아둔 적이 있다. 그러나 내 마음속에 있는 가구의 먼지도 아직 다 털어내지 못하고 있는데 매일 한 번씩 그 석회석들의 먼지를 털어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끔찍해졌다.
인간은 이제 자신들이 쓰는 도구의 도구가 되어버렸다.
  문명인이란 경험이 더 많고 더 현명해진 야만인에 불과하다.  
  우리의 발명품들은 진지한 일에서 우리의 관심을 빼앗아가는 예쁜 장난감 노릇을 하기 쉽다.  
  간단히 말해서, 나는 신념과 경험을 통해 우리가 간소하고 현명하게 살 의지만 있다면 이 지상에서 자신을 부양하는 일은 고통이 아니라 오히려 즐거움이라고 확신한다.  
  새롭게 얻은 힘과 우리 내부의 열망에 밀려 눈을 뜰 때만 전날 잠에 빠질 때보다 더 고귀한 삶을 시작할 수 있다.  
  인생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인생을 살고 싶지 않았다. 삶이란 매우 소중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불가피하면 모를까 나는 체념을 실천하고 싶지도 않았다.  
  간소하게, 간소하게, 그리고 또 간소하게 살아야 된다는 것을 명심하라! 자신의 일을 백이나 천 가지가 아니라 두세 가지로 줄여라. 백만 대신 대여섯만 세고 계산은 엄지손톱 위에 적어두어라.  
  우리가 서두르지 않고 현명하게 살아간다면, 위대하고 가치 있는 것들만이 영원하고 절대적인 존재이며 사소한 불안이나 사소한 쾌락은 실재하는 것들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될 것이다.  
  하루를 자연처럼 느긋하게 보내자. 그리하여 호두 껍데기나 모기 날개 따위가 선로 위에 떨어진다고 해서 그때마다 탈선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  
  사색을 통해 우리는 건전한 의미에서 자기 자신을 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의식적인 마음의 노력으로 우리는 행위들과 그 결과로부터 초연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모든 일이 격류처럼 우리 곁을 지나쳐가는 것이다.  
  생각하거나 일하는 사람은 어디에 있든지 항상 혼자다.  
  길을 잃고 나서야, 아니 세상을 잃고 나서야 우리는 비로소 자기 자신을 발견하기 시작하며, 우리가 놓인 위치와 무한한 범위로 펼쳐진 인간관계를 깨닫기 시작하는 것이다.  
  당시 나는 참으로 부유했다. 금전상으로가 아니라 밝은 시간과 여름날들을 풍성하게 가졌다는 의미에서 부자였다. 나는 그것들을 아낌없이 썼다. 그런 시간들을 작업장이나 교사의 교단5에서 좀 더 보내지 않은 것에 대해 나는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우리는 매일 먼 곳으로부터, 모험과 위험과 발견으로부터 새로운 경험과 성격을 얻어가지고 집에 돌아와야 한다.  
  우리가 항상 현재에 살면서 자신에게 떨어지는 작은 이슬 단 한 방울의 영향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풀처럼 우리에게 닥친 모든 일을 최대로 이용한다면, 또한 의무 수행이니 하며 과거의 기회를 소홀히 한 것에 대해 참회하는 일로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면 우리는 축복을 받을 것이다.  
  나는 내가 한 실험을 통해 적어도 배운 것이 있다. 즉 사람이 자기 꿈의 방향으로 자신 있게 나아가서 자기가 상상해온 삶을 살려고 노력하면 보통 때는 생각지도 못한 성공과 마주친다는 것을 알았다.  
  미래라든가 가능성이라는 견지에서 볼 때 우리는 우리 앞길에 대해서는 느긋하면서 한계를 긋지 않은 채로 살아가야 하며, 그쪽에다 비치는 우리의 윤곽은 희미하고 애매하게 남겨두어야 할 것이다.  
  당신의 삶이 아무리 비천하더라도 당당히 맞이하여 살아라. 그 삶을 회피하거나 거기다 대고 욕하지 마라. 그런 삶도 당신 자신만큼 나쁘지는 않은 것이다. 당신이 가장 부유할 때 당신의 삶은 가장 빈곤하게 보인다. 흠을 잡는 사람은 천국에서도 흠을 잡을 것이다. 당신의 삶이 빈곤하더라도 그것을 사랑하라. 당신이 비록 구빈원 신세를 지고 있더라도 그곳에서 유쾌하고 고무적인 멋진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지는 해는 부자의 저택이나 마찬가지로 양로원 창에도 밝게 비친다. 봄이 오면 양로원 문 앞의 눈도 녹는다. 인생을 차분하게 바라보는 사람은 그런 곳에 살더라도 마치 궁전에 사는 것처럼 만족한 마음과 유쾌한 생각을 가질 수 있다.  

  나는 내가 갈 수 있는 유일한 길, 어떤 권력도 나를 막을 수 없는 길을 가고 싶다.  
  이 초조하고 불안하고 요란하면서도 보잘것없는 19세기 속에 사는 것이 아니라, 이 세기가 지나가는 동안 서거나 앉아서 깊은 생각에 잠기고 싶다.  
사랑보다, 돈보다, 명예보다 진실을 달라.
  우리의 눈을 감기는 빛은 우리에겐 어둠이다. 우리가 눈을 뜨는 날만이 동이 트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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