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디북스 저자 소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과학자이자 저술가인 리처드 도킨스는 1941년 케냐 나이로비에서 태어나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수학하였다. 이후 동물행동학 연구로 노벨상을 수상한 니코 틴버겐(N. Tinbergen)에게 배운 뒤 촉망받는 젊은 학자로 학문적 여정을 시작했다. 1995년부터 2008년까지 옥스퍼드대학교에서 과학의 대중적 이해를 전담하는 석좌교수직을 맡았으며, 현재는 뉴칼리지의 명예교수이다. 영국 왕립학회 문학상과 로스앤젤레스 문학상(1987), 왕립학회의 마이클 페러데이상(1990), 과학에 대한 저술에 수여하는 루이스 토머스상(2006), 과학의 대중적 이해에 기여한 사람에게 수여하는 니렌버그상(2009) 등 수많은 상과 명예학위를 받았다. 또 2013년에는 『프로스펙트』지가 독자들의 투표로 선정하는 ‘세계 최고의 지성’ 1위에 오른 바 있다.
지은 책으로 『확장된 표현형(The Extended Phenotype)』, 『눈먼 시계공(The Blind Watchmaker)』, 『에덴의 강(River Out of Eden)』, 『불가능한 산 오르기(Climbing Mount Improbable)』, 『무지개를 풀며(Unweaving the Rainbow)』, 『조상 이야기(The Ancestor’s Tale)』,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 『지상 최대의 쇼(The Greatest Show on Earth)』 등이 있다.
유명한 책이다. 마침 구독하고 있던 전자책 서비스에 공개되어 읽어보았다.
모든 생물은 유전자가 만들어 낸 생존기계이다. 이를 주장하는 저자의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세상을 관통하는 생물학의 진리를 엿본 기분이다. 유전자의 관점에서 생물체는 거쳐가는 통로에 불과할 뿐, 자기복제를 통해 살아남아 이어지는 것은 유전자이다. 그리고 이렇게 복제를 통한 생존을 위해 선택된 생물 개체의 진화, 행동과 확장된 표현형은 생각해볼수록 흥미롭다. 또한 생물학적인 표현을 넘어 문화론적 '밈'에 대한 생각과 우리의 삶 속 일들에 비교하여 생각해보기까지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았다. 저자의 설명은 간결하면서 명쾌하며, 생물학에 대한 전문 지식이 없어도 무리 없이 이해하며 읽을 수 있어 좋았다. 다만, 번역의 문제인지 가독성은 떨어지는 편이었다. 쉬면서 읽는걸 권한다.
유전자의 관점에서 보편적 설명을 이끌어내어 좋았다. 예를 들어 특정 생물만 그렇다거나 하는 내용이 나왔다면 생물학에 큰 관심이 없는 나로서는 책을 계속 읽어나가기 힘들었을 것이다(예시로 특정 생물을 언급하기는 하나 그 목적은 보편적인 이야기를 설명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이 책은 특정 생물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지구의 생물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리가 분자에서 단백질로, 단세포로, 결국엔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는지에 대한 물음은 흥미를 끌 수 밖에 없는 근원적 질문이 아닐까?
우리의 육체가 결국 유전자의 생존 기계일 뿐이라는 말은 차갑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동시에 위로도 된다. 우리가 죽더라도, 우리의 유전자는 불멸의 삶을 계속 살아간다는 생각을 하게 되니 말이다. 수동적이고 조종당하는 존재로만 느껴지기엔 '인류는 유전자의 조종에 반역을 일으킬 수 있는 지구상의 유일한 종'이라는 표현에 마음이 놓인다. 우리는 유전자의 생존 기계라는 표현이 위로로 받아들여질지, 자아의 주체성에 대한 의심으로 이어질지는 독자의 생각에 달린 듯 하다. 어떻게 해석되든지간에 이러한 이론은 어떠한 의도도 없이 존재할 뿐이다.
이 책이 주장하는 바는 사람을 비롯한 모든 동물이 유전자가 만들어 낸 기계라는 것이다.
이타주의와 이기주의의 정의가 주관이 아닌 행동에 근거한 것임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마도 집단선택설이 큰 매력을 갖는 이유는 그것이 대부분 우리가 갖고 있는 도덕적 이상이나 저치적 이상과 조화를 이루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의 자손인 현재의 DNA 분자는 인간의 정확한 복사 기술에 견주어 보아도 놀랄 만큼 정확하지만, 그 DNA 분자도 때로는 오류를 일으킨다. 그리고 결국 진화를 가능케 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오류다.
우리 자신이 진화의 산물이기 때문에 우리는 진화를 막연히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실제로 진화를 '바라는' 것은 없다는 것이 그 질문에 대한 답이다.
유전자는 선견지명이 없다. 미래에 대한 계획이 없다. 유전자는 그저 존재할 뿐이다.
유전자의 길은 끊임없이 교차하면서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진다. 한 개의 유전자는 수많은 개체의 몸을 연속적으로 거쳐 생존하는 단위라고 생각해도 좋다.
유전자들은 자기 복제자이고 우리는 그들의 생존 기계다. 우리의 임무를 다하면 우리는 폐기된다. 그러나 유전자는 지질학적 시간을 살아가는 존재이며, 영원하다.
치열한 생존 경쟁에서 중요한 것은 차이이고, 진화에서 중요한 것은 '유전자에 의해 제어되는 차이'이다.
진화는 유전자 풀 속에서 어떤 유전자는 그 수가 늘어나고 또 어떤 유전자는 수가 줄어드는 과정이다.
진화라는 카지노에서 쓰이는 판돈은 생존이다.
의식에 대해 제기되는 철학적 문제가 무엇이든, 현재 우리의 목적에서 의식이란, 실행의 결정권을 갖는 생존 기계가 그들의 궁극적 주인인 유전자로부터 해방되는 진화의 정점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모든 동물의 의사소통에는 처음부터 사기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지 모른다. 왜냐하면 모든 동물의 상호 작용에는 적어도 어느 정도 이해의 충돌이 내재하기 때문이다.
크고 복잡한 경쟁 시스템 속에서는 눈앞의 경쟁자를 없애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그 경쟁자의 죽음으로 당사자보다 다른 경쟁자가 이득을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진화적으로 안정한 전략, 즉 ESS는 개체군에 있는 대부분의 구성원이 일단 그 전략을 채택하면 다른 대체 전략이 그 전략을 능가할 수 없는 전략이라고 정의된다. 이것은 미묘하고도 중요한 개념이다. 바꿔 말하면, 어떤 개체에게 가장 좋은 전략은 개체군 대부분이 무엇을 하고 있느냐에 따라 좌우된다는 것이다.
ESS는 안정한 것이다. 이는 ESS에 참여하는 개체에게 딱히 유리해서가 아니라, 내부로부터의 배신에도 흔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경우에 공모(혹은 협정)가 가능한 이유는, 개인 모두가 의식적으로 미래를 예견하고 그 협정의 규약에 따르는 것이 자기의 장기적 이익에 좋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의 협정에서도 그 협정을 파기하면 단기적으로 큰 이득이 되기 때문에 그러고 싶은 유혹이 압도적으로 커질 위험이 있다.
소모전에서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 진실을 말하는 것보다 진화적으로 안정한 전략이 아니다. 무표정한 얼굴은 진화적으로 안정하다. 결국 항복한다고 해도 그것은 돌발적이고 예측 불가능해야 한다.
생명체의 몸은 지금까지 생존해 온 유전자가 프로그램한 기계다. 지금까지 생존해 온 유전자는 과거에 그 종이 살아왔던 환경의 평균적 특징이 되는 조건들 속에서 생존해 왔던 것이다. 따라서 손익의 '추산'은 인간이 결정을 할 때처럼 과거의 '경험'에 근거하게 된다. 그러나 이때의 경험은 유전자의 경험, 더 정확히 말하면 과거에 유전자가 살아남은 조건을 말하는 것이다.
상상컨대, 인종 편견이란 신체적으로 자기와 닮은 개체를 인식하고 겉모양이 다른 개체에게 못되게 구는, 혈연선태글 거쳐 진화해 온 경향이 비이성적으로 일반화된 결과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미는 자기 유전자를 갖고 있는 개체를 확실히 알 수 있는 기회가 충분하지만 불쌍한 아비는 속기 쉽다. 그래서 아비는 어미만큼 육아에 열중하지 않을 것이라 기대할 수 있다.
매 초 수백만 대의 로켓을 발사하여 우주로 대량 이민이라도 보내지 않는 한, 출생률이 조절되지 않으면 필연적으로 사망률이 엄청나게 증가할 것이라는 사실은 단순하지만 논리적인 진리다.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이 단순한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효과적인 피임 수단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지도자들이 있다. 그들은 인구를 '자연적인' 방법으로 제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는데, 그들이 원하는 대로라면 우리는 자연적인 방법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바로 기아다.
자연계에는 복지 국가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출생률을 이타적으로 자제할 필요가 없다. 또한 자제를 모르고 방종을 가져오는 모든 유전자는 즉시 벌을 받는다. 그 유전자를 보유한 아이들은 굶주리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 인간은 너무 많은 아이를 가진 가정의 아이들이 굶어 죽는다 해도 아무런 대책이 없었던 옛날의 이기적인 방법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가족을 경제적인 자급자족 단위로 하는 것을 폐지하고 그 대신에 국가를 경제 단위로 한 것이다. 그러나 아이에 대한 생활 보장의 특권은 결코 남용되어서는 안 된다.
피임은 종종 '부자연스럽다'고 비난받는다. 그렇다. 극히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문제는 복지 국가도 마찬가지라는 점이다. 우리의 대부분은 복지 국가를 매우 바람직한 것으로 믿고 있다. 그러나 부자연스러운 복지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부자연스러운 산아 제한을 실행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연 상태에 있는 것보다 더 비참한 결과에 이를 것이다.
어떠한 이타적 시스템도 본질적으로 불안정하다. 그것은 그 시스템을 착취할 만반의 준비를 갖춘 이기적 개체에게 남용당할 여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가 키울 수 있는 것 이상의 아이를 낳은 사람들은 대개의 경우 무지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므로, 그들이 의식적으로 악용을 꾀한다고 보긴 어렵다. 다만 나는 다수의 아이를 낳도록 의도적으로 선동하는 지도자나 강력한 조직에 대해서는 그 혐의를 풀 수 없다고 생각한다.
작고 어린 새끼는 어미가 분산 투자를 통해 손실을 줄이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이 현상은 많은 조류에서 관찰된다.
진화에서 실제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실체, 그리고 이에 근거한 관점이 의미를 가지는 실체는 오직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이기적 유전자다.
이 논의에서 인간의 윤리에 대한 교훈을 도출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자식들에게 이타주의를 가르쳐 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자식들의 생물학적 본성에 이타주의가 심어져 있다고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암컷이 만들 수 있는 자식의 수에는 한게가 있는 반면에 수컷이 만들 수 있는 자식의 수에는 사실상 한게가 없다. 수컷의 암컷 착취는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난자는 상대적으로 귀중한 자원이기 때문에 암컷은 수컷만큼 성적 매력이 철철 넘치지 않더라도 난자의 수정을 확실히 보증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수컷이 암컷에 비해 상대를 가리지 않고 교미하는 경향이 강하다. 암컷은 한정된 수의 난자를 비교적 느린 속도로 만들어 내기 때문에, 여러 수컷과 교미를 많이 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별다른 이익이 없다. 한편 수컷은 매일 막대한 수의 정자를 만들 수 있으므로 상대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많은 교미를 해서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다.
바이러스는 우리의 몸과 같은 '유전자 집합체'에서 이탈된 유전자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문화적 전달은 유전적 전달과 유사하다. 기본적으로는 유전적 전달이 더 보수적이지만 일종의 진화를 일으킨다는 점에서 유사하다는 것이다.
한 밈이 어떤 사람의 뇌의 집중려글 독점하고 있다면 '경쟁자'의 밈이 희생되는 것은 틀림없다. 밈은 라디오와 텔레비전의 방송 시간, 광고 게시판의 공간, 신문 기사의 길이, 그리고 도서관의 서가 공간 등과 같은 상품에서도 경쟁하고 있다.
맹신이라는 밈은 이성적인 물음을 꺾어 버리는 단순한 무의식적 수단을 행사하며 불멸의 존재가 되는 것이다.
번식이라는 과정 속에서 불멸을 찾을 수는 없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세계 문화에 무언가 기여할 수 있다면, 예컨대 좋은 아이디어를 내거나, 으막을 작곡하거나, 점화 플러그를 발명하거나, 시를 쓰거나 하면, 그것들은 우리의 유전자가 공통의 유전자 풀 속에 용해되어 버린 후에도 온전히 살아남을 수 있을지 모른다.
이 지구에서는 우리 인간만이 유일하게 이기적인 자기 복제자의 폭정에 반역할 수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승리하는 전략에 두 가지 특징이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즉 '마음씨 좋음'과 '관대'다. 유토피아에서나 나올 법한, 마음씨 좋고 관대하면 이득이 된다는 이 결론은 너무 잔꾀를 부려 미묘하게 못된 전략을 제출한 전문가들에게는 놀라운 것이었다.
어떤 전략이 계속 성공하기 위해서는 그 전략이 다수일 때, 즉 자기 자신의 사본이 많은 환경에서 특히 잘되어야 한다.
우리가 민사'분쟁'이라고 하는 것에는 실제로 크나큰 협력의 여지가 남아 있는 경우가 흔하다. 영합 대립으로 보이는 것에 약간의 선의를 보태면 쌍방에 이익을 주는 비영합 게임으로 바꿀 수 있다.
이혼을 '내가 이기고 너는 진다'라는 싸움으로 다룬다면 누가 이익을 얻겠는가? 이익을 보는 것은 아마도 변호사들뿐이다.
의뢰인에게는 영합 게임이지만 변호사에게는 비영합 게임이다.
사실 실생활의 많은 측면은 비영합 게임에 해당한다.
게임의 미래에 대한 추정치가 짧으면 짧을수록 그는 단 한 번의 게임에 대한 수학자의 예측에 따라 경기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더 못되고 더 시샘하게 될 것이다.
보복의 위협은 항상 존재해야 한다. 보복할 수 있음을 과시하는 것은 '우리도 살고 남도 살리자'방식의 주목할 만한 특징이다.
액설로드는 또 상호 신뢰의 안정된 패턴을 유지하는 데 에측 가능성과 의례도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액설로드는 그와 같은 "형식적이고 정기적인 발포 의례는 이중의 메시지를 보낸다. 사령부에게는 공격을, 적에게는 평화를 전하고 있다."라고 논평한다.
다윈주의에 관한 문헌이 우리에게 알려 주는 것은 특정 생물에 대한 섬세한 에측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더 미묘하고 더 귀중한 무엇인가를 알려 준다. 바로 원리를 이해시켜 준다.
유전자는 '자신의' 몸 바깥까지 팔을 뻗쳐서 다른 생물체의 표현형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태고의 기생자들이 합체한 것의 유물일지도 모른다.
자기 유전자가 숙주의 유전자와 운명을 같이하기를 열망하는 기생자는 모든 이해관계를 숙주와 공유하고 최종적으로는 기생적 작용을 멈추게 된다는 것이다.
기생자의 유전자들이 서로 합심하여 숙주의 유전자들(이들도 서로 합심하여 일한다)과 대립할 때, 우리는 그 이유가 두 세트의 유전자가 공통의 운반자, 즉 숙주의 몸에서 떠나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모든 세포는 똑같은 유전자를 갖고 있다. 다만 다른 종류의 특수화된 세포마다 다른 유전자의 스위치가 켜질 뿐이다.
모든 생명의 원동력이자 가장 근본적인 단위는 자기 복제자다.
우주의 어느 장소든 생명이 나타나기 위해 존재해야만 하는 유일한 실체는 불멸의 자기 복제자뿐이다.
'원칙적으로' 내 논의와 같은 논의는 실제 세계와 무관하다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으며, 특정 사실에 대한 연구에 기반을 두고 있는 논의들보다 훨씬 더 강력할 수 있다.
약간 정확도가 떨어지는 자기 복제자가 일단 우주상 어디에라도 나타난다면 이들은 무한한 힘을 갖게 될 것이라는 것이 내가 주장하고 싶은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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