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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독후감

[19-14] 모든 요일의 여행 - 김민철

by 이윤도 2019. 9. 22.


남자 이름이지만 엄연히 여자인 저자는 카피 한 줄 못 외우지만 엄연히 카피라이터이다. 그 흔한 공모전 한번 안 해보고 광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이유로, 잡다한 것들에 대해서는 ‘어렴풋하게’ 안다는 이유로 2005년, 광고대행사 TBWA KOREA의 카피라이터가 됐다. 광고를 너무 몰라서, 기억력이 너무 지독해서 살아남기 위해 회의 시간에 치밀한 필기를 시작했고, 그 회의록을 바탕으로 2011년, 《우리 회의나 할까?》라는 책을 냈다. 박웅현 CCO 팀에서 11년째 일하며 SK텔레콤 ‘사람을 향합니다’, 네이버 ‘세상의 모든 지식’ e편한세상 ‘진심이 짓는다’, SK이노베이션 ‘혁신을 혁신하다’ 등의 캠페인에 참여했다. 15초라는 찰나의 시간을 위해 한 달이 넘게 고민하는 세계에서 하루하루 살고 있다. (리디북스 작가 소개 中)


모든 요일의 기록에 이어 읽은 저자의 책이다. 읽으며 때론 공감했지만 나에 비해서 감성이 과한 부분이 있어서 부담스럽게 느껴질까 걱정도 했다. 하지만 그런 걱정은 필요 없었다. 외부 환경에 대한 해석 없이 느낀 감각만을 간결하게 적는다면 자칫 밋밋해질 수 있다. 해석 없는 일차적 감각의 서술에서는 저자를 느낄 수 없다. 마치 돋보기를 사용하듯, 주어진 사건에 저자가 어떤 생각을 하고 무엇을 느꼈는지 알아보는 것에 독서의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는 특히 유럽 여행을 많이 다녀온 듯 보였다. 책의 제목처럼 충실한 여행자로 보였다. 관광객이 아닌 여행객 말이다. 흔한 장소를 가기보다 테마를 잡아 그 테마에 집중하는 여행을 했다. 유명한 관광지를 다니고 사진을 남기는 일반적인 관광객의 모습이 아닌 여행객의 모습이 인상 깊었다. 그림을 좋아하여 명화 관람 여행, 벽에 꽂혀 유럽의 이름 모를 동네의 벽을 보고 다닌 여행, 맥주를 마시기 위해 떠난 신혼여행 등 다채롭고 지루하지 않은 여행이었다. 그렇게 계획해 떠난 여행은 느긋했다. 저자의 말대로 어느 시간에 어디에 있을지 스스로 결정하는 여행은 자신이 선택한 곳에서 즐기고자 하는 것을 즐기는 모습이었다.


여행지에서 바쁘게 돌아다녀야한다는 강박을 지니고 있던 저자가 차츰 여유를 찾고 작은 행복을 발견하기 시작하는 모습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피곤해지는 여행이 아닌 행복한 여행. 유용함이 아닌 무용함을 찾아 떠나는 여행. 결국 저자는 수많은 여행 후에 여행자의 마음가짐을 배운다. 그리고 살고 있는 동네의 여행자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한다. 여행지에서의 마음가짐을 일상생활에서도 가진다면, 일상을 여행하며 더욱 행복할 수 있을 테니까.


나는 여행을 즐기는 편은 아니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말에 큰 공감을 하는 편이다. 그래서인지 이번 책을 읽기 전부터 큰 흥미가 가진 않았다. 그럼에도 읽은 이유라면 여행을 즐기는 사람은 어떤 점에서 여행을 즐기게 되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저자가 말한 그 이유 속에서 나의 모습을 발견했다. 유용함만을 기준 삼아 살아가는 일상생활 속에서 내가 바라는 사치 또한 무용한 시간이었다. 커피를 시키고 멍을 때리며 주변을 구경하는 일 같이 말이다. 일상 생활 속에서 틈틈이 이런 무용한 시간을 갖기란 쉽지 않다. 사회는 우리에게 자투리 시간 또한 활용하라며 재촉한다. 무용한 휴식 시간을 보내는 데에 죄책감마저 느끼기도 한다. 저자는 여행을 통해 본격적으로 무용한 시간이자 즐길 수 있는 시간을 보내고 왔다. 그런 의미로 본다면 나는 여행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여행을 가면 무엇을 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싫어한다고 오해하던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어서 자기반성을 했다. 나는 여행을 싫어한다는 명제는 나는 어떤 여행을 싫어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바뀌었다. 항상 어딜 가서 무엇을 보고 와야 한다는 여행은 부담이었다. 하지만 20살 때의 나를 돌이켜보면 서울에 홀로 여행을 가서 무용하게도 돌아다녔고, 즐거웠다. 시장에 들어가 대낮에 막걸리에 녹두전을 먹고 기분 좋게 철물점 사이를 구경하며 걸었던 나의 모습이 여행자의 모습이었음을 깨달았다. '어디에 갔으니 무얼 해야지', '어디에 갈 예정이니 계획을 치밀하게 짜야지'같은 압박감이 내 눈을 가리고 귀를 막았던 것 같다. 저자 덕분에 이번 여름에 여행을 한 번 가볼까 한다. 일상 또한 여행자처럼 보내기로 다짐해본다. 굳이 멀리 가는 것만이 여행이 아니라 마음가짐에 따라, 자신이 보고자 하는 것에 따라 일상도 여행이 될 수 있음을 마음에 새겨봐야겠다.


p.s 독후감을 일찍 썼었는데, 여름에 내일로 여행을 다녀왔다. 생각보다 피곤하지 않았고 재밌었다. 무용한 시간을 마음껏 즐겼다. 나의 여행 취향을 알아내서 기쁜 마음이다.


맛있어야 했다. 나는 행복해야 했다. 파리에 왔으니까. 어떻게 내가 여기까지 왔는데 안 행복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감히 행복을 의심할 수 있겠는가. 어느새 나는 행복을 연기하는 배우가 되었다.

우리는 선택을 한다. 지금 어디에 있을 것인가. 거기에 언제 있을 것인가. 여행에서 이 두 가지 질문은 끝없이 교차한다. 나의 시간을 선택하고 나의 공간을 선택하여 그 둘을 직조하면 비로소 나의 여행의 무늬가 드러난다. 이 무늬는 전적으로 나의 선택이며 나의 책임이다. 그러므로 그 무늬를 사랑하는 것은 나의 의무가 된다.

실수로 이상한 버스에 올라탄 순간, 그 이상한 버스를 나도 모르게 선택해버린 순간, 나만의 여행은 직조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평가의 기준은 언제나 우리의 유용함이다. 그러니 일상 속에서 꿈꾸는 사치는 이런 것이다. 햇빛 아래 맛있는 커피 한 잔 시켜놓고 책을 읽거나 멍하니 먼 곳만 보거나 지나가는 사람들만 구경하거나 그러니까 있는 대로 여유를 부리는 텅 빈 시간, 한 껏 무용한 시간.

유용한 시간을 그만두고 무용한 시간을 찾아 길 위에 다시 설 수밖에 없다.

매일 더 부지런한 동네 여행자가 되자고 마음을 먹는다. 멀리 떠나는 것만이 여행은 아니니까. 멀리 여행을 떠나 비싼 수업료를 내고 배운 것은 결국 여행자의 마음가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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