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시작에서 저자인 카롤린 엠케(Carolin Emcke)를 소개해준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독일의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이며 런던대학교, 프랑크푸르트대학교, 하버드대학교에서 역사와 정치, 철학을 공부했다. 1998년부터 2013년까지 전 세계 분쟁지역을 다니며 저널리스트로 활약했고, 2003년부터 2004년까지 예일대학교에서 정치이론을 강의했다. 현재 독일에서 가장 눈에 띄는 지식인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활발히 활동 중이다. 여성이자 성소수자로서 전쟁과 사회적 폭력, 혐오 문제의 구조를 파헤치고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드러내는 데 주력하고 있다.
근래의 혐오라는 단어는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끊임없이 나오는 여혐남혐 논란뿐만이 아니다. 정치인, 연예인, 난민문제 등 각종 사회 이슈 기사들을 볼 때면 혐오성 댓글이 없는 곳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그런 글들을 볼 때면 ‘언제부터, 왜 이렇게 되었을까?’라는 피곤함이 섞인 질문은 많은 이가 하고 있지 않나 싶다. 단순히 몇몇의 이상한 사람으로 치부하기엔 너무나 다양한 주제에 많은 악성 댓글, 혐오성 글들이 보인다. 이쯤 되면 문제는 개인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있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와중에 이 책의 제목은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혐오와 증오는 느닷없이 폭발하는 것이 아니라 훈련되고 양성된다. 그것을 자발적이거나 개인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모든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그 감정들이 계속 양성되는 일에 기여하는 셈이다.
'증오는 어떻게 전염되고 확산되는가?'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혐오와 증오의 문제에 대해 냉철하게 분석한 책이다. 저자는 감정에 호소하지 않는다. ‘혐오와 증오는 나쁜 것이니까 착하게 살아야 한다‘라는 뻔한 이야기도 아니다. 저자는 혐오와 증오를 관찰하고 해부하며, 거기서 멈추지 않고 해결하기 위해 고찰한다.
이 책은 독일의 사회적 배경을 바탕으로 저술된 책이지만 한국의 문제에 대입하여도 전혀 위화감이 없다. 그 이유는 혐오와 증오의 문제를 다루며 제시하는 문제들이 낯설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인종차별과 난민 문제, 성차별과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인 IS의 광신주의까지 우리 모두 뉴스로 접해본 이슈들이다. 저자는 이러한 문제들을 낱낱이 해체하여 문명인, 그리고 시민으로서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를 생각하게 해 준다..
읽으며 냉철한 분석에 놀라는 부분이 많았다. 저자의 분석과 고찰, 그리고 물음을 따라가며 반성하는 점도 많았다. 스스로도 은연중에 가지고 있던 혐오를 마주치기도 했다. 지금까지 혐오를 방치해오기도 했음을 알게 되었다. 깊은 생각 없이 막연히 가지고 있던 선과 악으로 나뉜 이분법적 가치관, 걱정이라는 감정으로 포장된 투사적 혐오 등 과거의 나를 반성하는 계기가 되어 주었다.
책에서 증오와 혐오의 문제에 대응하는 방법론은 일반적인 방법론이다. 예전의 나였다면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말은 싫어했겠지만, 지금은 다르다. 뻔하다고 생각하는 말을 지키기가 가장 어려운 법이다. 부정적 감정을 배설하는 것은 쉽다. 이러한 적대적인 감정들을 해결하기 위해 문제를 관찰하고, 파헤치고 따지는 것은 어렵다. 저자는 혐오 감정이 퍼지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말한다.
모든 사람이 다 같은 부류는 아니더라도 다 같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단지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그 가치의 동등함을 명백하게 표현해야 한다. 즉, 압박과 증오에 맞서 실제로 소송을 제기함으로써 진실이 시적인 상상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실현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보편적인 가치로써 평등과 자유 등을 믿지만 단지 믿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이러한 가치들을 훼손하려는 자들을 방관하지 않고 끊임없이 이의를 제기해야 할 것이다.
증오한다는 건 확신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 증오하는 자에게는 자기 확신이 있어야 한다. 한 점의 회의도 있어선 안 된다. 그 앞에서 의심하는 자는 증오할 수 없다. 회의한다면 그렇게 이성을 잃을 리 없다. 증오에는 절대적 확신이 필요하다.…
증오하는 자는 대상이 명확하다. 모호함이 없기 때문에 절대적 확신을 하게 된다. 그들에게 개개인의 다양성과 고유함은 보이지 않는다. 특정한 집단, 덩어리로 바라보며 증오하기에 마땅한 대상이라고 확신한다. 생각해보자. 인터넷 포털 기사 댓글만 가봐도 증오하는 사람들은 확신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요즘에는 적대감을 과시적으로 표출하는 행위에 이른바 공적인 의미, 심지어 정치적 의미가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에 편승해 내면의 모든 천박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도 된다고 생각한다면 결코 문명인이라 할 수 없다.
표현의 자유를 언급하며 악성 댓글을 정당화하는 부류를 많이 보아왔다. 하지만 그 자유는 기본적으로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아야 한다. 자신의 생각조차 말하지 못하냐며 모든 천박함을 드러내는 자들은 문명인이라 할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걱정이라는 것을 엄밀히 성찰하고 어떤 요소들이 그 걱정을 이루고 있는지 분석해보아야 한다. 또한 걱정하는 사람들은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이 ‘투사적 혐오’라고 말한 것, 즉 단순히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는 핑계로 다른 사람들을 거부하는 것과 걱정은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걱정을 성찰하고 어떤 요소들로 이루어졌는지 분석한다는 것. 우리는 필요한 걱정을 해야 한다. 정당화할 수 있는 걱정은 정당화하되, 실제적인 근거가 없는 걱정은 비판해야 한다. 무심결에 근거 자료 없는 주장을 믿으며 혐오하고 있진 않은가?
증오를 느끼려면 우선 증오의 대상이 실존적으로 중요하며 괴물 같은 존재로 여겨져야만 한다. 그러려면 먼저 실제의 권력구도를 임의로 뒤집어야만 한다.
1을 말했는데 10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떠올랐다. 마치 섀도우 복싱을 하듯 구체적 대상은 없이 상상 속 괴물과 싸우는 사람들 또한 찾아보려면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개입하지 않는 사람들, 스스로 그렇게 행동하지는 않더라도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동조적으로 용인하는 사람들 역시 증오를 가능하게 하고 확장한다.
방관하는 자는 암묵적으로 해당 행위를 허용한 것이다. 증오하는 자들은 방관하는 자를 관객으로 삼고 무대는 더욱 커져간다. 단순한 구경꾼 또한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단지 하지 않는 정도를 넘어서 하는 이들을 제지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독단에 빠진 광신주의자들이 의존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확실한 명확성이다.
무엇이든 광적으로 믿는 사람에게는 답이 이미 정해져 있다. 이러한 명확성을 가진 사람과는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는 게 큰 문제다.
실제로 행해지고 존중받는 다른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은 그들의 개인성뿐 아니라 나 자신의 개인성까지 지켜준다.
다양성을 인정하고 포용해야 한다. 그들을 위해서가 아닌 나를 위해서이기도 하다. 다양한 우리가 될 때, 고유한 내가 생긴다.
실제로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사회가 지닌 크나큰 자유도 바로 서로 좋아할 필요는 없어도 서로를 허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생긴다.
좋아할 필요는 없어도 허용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사회를 만든다는 것. 어렵지 않은 것 같지만 생각보다 이 지점에서 생기는 문제들도 많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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