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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독후감

[20-16] 멋진 신세계 - 올더스 헉슬리

by 이윤도 2020. 6. 14.

<멋진 신세계> - 올더스 헉슬리

 

<Brave New World (영어로 읽는 세계문학 51)> 저자 소개

  1894~1963. 영국의 소설가. 아버지는 서리주(州) 고덜밍에 있는 차터하우스학교 부교장이었고, 조부는 저명한 동물학자 T.H.헉슬리이다. 시인이자 문예비평가인 M.아놀드, 종교와 사회문제를 대담한 소설로 묘사한 햄프리 워드 부인은 그 외척이고, 생물학자 J.S.헉슬리는 올더스 헉슬리의 형이다. 그는 이러한 지적(知的) 환경 속에 태어나 이튼스쿨을 졸업한 뒤 옥스퍼드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하였다. 이튼스쿨 시절에 거의 실명(失明)에 가까운 안질을 앓은 탓으로, 당초에 마음먹었던 의학도의 길은 포기하였다.

  1916년 시집 <불타는 수레바퀴>를 출판한 이래 몇 권의 시집도 냈으나, 그가 소설가로 일생을 보내기로 결심한 것은, 소설 <크롬 옐로>(1921)가 인정을 받게 된 후부터다. 다음 소설 <어릿광대의 춤>(1923)은 생존의 의의를 상실한 삶의 권태 속에서 방황하는 제1차 세계대전 후의 지식인과 유한부인(有閑夫人)을 묘사한 작품이다. <연애대위법(戀愛對位法)>(1928)은 갖가지 유형의 1920년대 지식인들이 풍자적으로 묘사된 작품이며 이 소설로 그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작가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 외 저서에 일종의 디스토피아 소설인 <멋진 신세계>(1932), 평화운동을 추구하는 작가 자신을 그린 <가자에서 눈이 멀어>(1936), 폭력의 부정을 역설한 <목적과 수단>(1937), 제3차 세계대전을 가상한 가공소설(架空小說) <원숭이와 본질>(1948), <루당의 악마>(1952), <천재와 여신>(1955), 과학에 지배되지 않는 이상적인 유토피아 생활을 추구한 작품 <섬>(1962) 등이 있다.


  언젠가 이 책의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인터넷에서 읽은 적이 있다. 

“나는 불행해질 권리를 주장하겠어요.”

책의 내용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 대사였다. 간략히 찾아 본 책의 세계관은 모두가 행복한 세계였다. 그러므로 부자연스러운 세계였다. 주인공은 왜 이런 말을 내뱉었던 것일까. 어떻게 모두가 행복한 세계에서 홀로 불행해질 권리를 주장한 것일까. 이 책 역시 미루고 미뤄오다 읽게 되었다.

 

  <멋진 신세계>에서 표현된 발전된 미래의 전체주의 세계 국가 속에서 개인은 지워진다. 이 소설에서 개인들은 억압받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통제받기를 원하며 스스로 자유를 포기한다. 모두가 '만족'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욕구는 즉각적으로 해소되며 불쾌한 감정은 정제된 알약인 '소마'를 먹음으로써 제거할 수 있다. 만족하였으므로 노예같은 생활에 대한 어떠한 반감도 존재하지 않으며 변화를 바라지도 않는다. 그렇게 '문명화'된 미래 사회 속에서 '야만인'이라 불리우는, 문명화되지 않은 인물이 겪는 이야기를 그려낸 소설이다.

 

  새롭게 다가온 설정이었다. 일반적인 소설이나 영화에서 전체주의 미래 국가를 그렸을 때, 통제와 억압이 존재하는 디스토피아에 대항하는 인물들이 나오기 마련이다. 하지만 올더스 헉슬리는 행복하기에 위험해보이는 디스토피아를 만들어냈다. 솔직히 헷갈린다. 유토피아일까 디스토피아일까. 기괴한 유토피아이며 빛나는 디스토피아라고 해야할까. 그들의 삶을 보면 안락하고 편해보이지만 무언가 허전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이에 대해 올더스 헉슬리는 소설 속 인물의 입을 빌려 그 이유를 말해주었다.

"만족한 상태는 불우한 환경에 대한 멋진 투쟁의 찬란함도 없고, 유혹에 대한 저항 그리고 격정이나 회의가 소용돌이치는 숙명적인 패배의 화려함도 전혀 없습니다. 행복이란 전혀 웅장하지 못하니까요."

 

  소설 속에 등장하는 '소마'라는 알약은 모든 불쾌한 감정을 없애고 기분을 좋게 만들며 편안한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들은 힘든 상황이나 불쾌한 감정에 직면하면 소마를 삼킨다. 의식을 포기하는 것이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닌, 도피하며 잊어버리는 것이다. 나는 이 알약을 섭취하는 인물들의 모습에서 유튜브와 각종 sns를 보며 무의미하게 시간을 버리던 내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다. 해야할 힘든 일들을 미루고 도피하게 만들며,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행동이라는 점에서 같았다. 불쾌한 감정을 잠시나마 잊게 해준다는 것에서 동질감을 느꼈다. 현대 사회에서 '소마'로 활용될 수 있는 기술들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모두가 행복하기만한 세상은 정말 행복한 것일까. 욕구가 즉각적으로 해소된다면 행복할 수 있을까. 내 인생에서 불행했던, 쓰라렸던 경험들이 없었다면 난 더 행복했을까. 힘들었기에 안쓰럽지만 대견했고, 못 이루었기에 아쉽지만 후회가 없다. 이러한 경험들이 없는 삶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 하지만 그럼에도 행복하기만 한 삶과 불행할 수도 있는 삶 중에서 선택하라하면 고민이 된다. 그런 면에서 '문명화'를 거부한 야만인은 불행이 삶에 가져다주는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듯 하다. 

“글쎄요, 난 이곳에서 당신들이 누리는 그런 거짓된 가짜 행복을 느끼기보다는 차라리 불행해지고 싶은데요.”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들어 준 책이다. 생각하기를 포기하게 만드는 사회, 자제력의 상실을 권하는 사회라는 관점에서 보면 우리 사회와는 전혀 다르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멋진 신세계> 속 통제관이나 국장들이 곧 컨텐츠 크리에이터이며, 지배 하에 있는 대다수의 사람이 컨텐츠 소비자가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편안하고 즐거운 기술의 발전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고자 하는지 생각해보게 만든다.


욕구와 해소 사이에 감정이 숨어서 기다린다. 그 사이를 단축시키고, 불필요한 모든 낡은 장애물을 무너뜨려라.
“모든 인간은 물리-화학적으로 평등하기 때문이죠.” 헨리가 단호하게 말했다.
“난 차라리 나 자신 그대로 남아 있고 싶어요.” 그가 말했다. “불쾌하더라도 나 자신 그대로요. 아무리 즐겁더라도 남이 되고 싶지는 않아요.”
웬일인지 그는 여태껏 포페를 진심으로 미워한 적이 없었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따지고 보면 얼마나 포페를 미워하는지 적절하게 표현할 길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사실상 그를 미워하지 않은 셈이었다.
달을 구경하느라 잠깐 우물쭈물하던 레니나가 눈을 떨구고는 옥상을 가로질러 그에게로 달려갔다.
“글쎄요, 난 이곳에서 당신들이 누리는 그런 거짓된 가짜 행복을 느끼기보다는 차라리 불행해지고 싶은데요.”
"만족한 상태는 불우한 환경에 대한 멋진 투쟁의 찬란함도 없고, 유혹에 대한 저항 그리고 격정이나 회의가 소용돌이치는 숙명적인 패배의 화려함도 전혀 없습니다. 행복이란 전혀 웅장하지 못하니까요."
오직 엡실론만이 엡실론다운 희생을 하리라고 기대할 수가 있는데, 최소한의 저항을 하는 훌륭한 혈통인 그들에게는 그것이 희생이 아니기 때문이죠. 그들이 받는 길들이기 훈련은 지정된 궤도 안에서만 달리게끔 목책을 둘러놓는 셈입니다. 그들에게는 미리 운명이 결정되어 있으므로 어쩔 수가 없어요.
“한심하다니요?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오히려 그들은 그런 일을 좋아해요. 그것은 부담이 없고, 유치할 만큼 단순하죠.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아무런 부담을 주지 않으니까요."
"인간은 무엇인가를 얻으려면 필연적으로 대가를 치러야 해. 행복은 대가를 치러야만 성취할 수 있다고. 자네들은 지금 그런 대가를 치르고 있어."
“하지만 난 안락함을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신을 원하고, 시를 원하고, 참된 위험을 원하고, 자유를 원하고, 그리고 선을 원합니다. 나는 죄악을 원합니다.” “사실상 당신은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하는 셈이군요.” 무스타파 몬드가 말했다. “그렇다면 좋습니다.” 야만인이 도전적으로 말했다. “나는 불행해질 권리를 주장하겠어요.”
그들에게 닥친 슬픔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슬픔은 서로 사랑한다는 증거였기 때문에, 바로 그 슬픔으로 인해 세 젊은이는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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