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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독후감

[20-10] 랩 걸(Lab girl) - 호프 자런

by 이윤도 2020. 4. 9.

<랩 걸(Lab girl)> - 호프 자런

리디북스 저자 소개

  1969년 미네소타 오스틴에서 과학 교수였던 아버지의 딸로 태어났다.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조지아 공과대학과 존스홉킨스 대학교에서 부교수로 재직했다. 풀프라이트 상을 세 번 수상한 유일한 여성 과학자로, 2005년에는 젊고 뛰어난 지구물리학자에게 수여하는 제임스 매클웨인 메달을 받았다. 2008년부터 2016년까지 하와이 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동위원소 분석을 통한 화석삼림 연구를 왕성하게 수행했다. 식물에 비추어 세상을 바라보는 통찰력이 돋보이는 책 《랩걸》을 통해 작가로서의 재능 또한 인정받았다. 2016년 《타임》이 선정한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 이름을 올리기도 한 그녀는 현재 오슬로 대학교에서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예전에 <알쓸신잡>에서 유시민 작가가 딸을 생각하며 고른 추천 도서로 유명해진 책이다. 내가 읽는 여느 책들이 그렇듯이 제목만 아는 채로 살아오다가 리디셀렉트 서비스에서 발견하고는 냉큼 다운로드해서 읽어 보았다. 

  이 책은 과학책이다. 하지만 읽어보면 자전적 에세이이기도 하다. 저자가 작은 소녀였던 시절부터 여성과학자로 성공한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 과정에서 저자는 경제적 어려움을 만나고, 건강상의 문제를 겪으며 성차별도 당한다. 하지만 저자는 열정적으로 일을 즐기고, 뛰어난 동료와의 우정을 지켜왔으며 연인을 만나 행복한 가정 또한 이룬다. 그 모든 과정 속에서 저자는 식물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식물 이야기를 읽다 보면 단지 식물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저자는 식물에서 삶에 대한 통찰을 이끌어낸다. 그러한 이야기들이 위로가 되는 책이었다.

  재미있게 읽었다. 과학 책이지만 딱딱하지 않았다. 심각하다가도 피식 웃게 만드는 유머가 있었다. 저자의 삶 그 자체로 매력적인 이야기였다. 뛰어나며 별난 동료인 빌과 저자가 함께하는 이야기들에서 느껴지는 깊은 우정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차를 타고 수백, 수천 킬로미터를 이동하거나 돈을 아끼기 위해 버려진 물건들을 가득 싣고 오며, 차에서 지내고 실험실에서 사는 이야기들에서 현실적 문제들을 잊게 만드는 그들의 열정이 느껴졌다.  

호프 자런(우측)과 동료 빌(좌측)

  저자의 삶과 식물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어떻게 살것인지 질문하며 읽을 수 있었다. 식물은 어디에서나 보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딱히 의식하지 않는다. 그래서 배경에 위치한 단순한 초록색 생물이라는 생각에 큰 기대가 없었다. 하지만 저자 호프 자런의 관점을 통해 바라본 식물은 내가 얼마나 그것들에 무지하였는지 깨닫게 해주었다. 또한, 그러한 지식을 사람들의 삶에 녹여내며 풀어내는 저자의 통찰력 있는 글쓰기에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책장을 덮으며 인상적이었던 구성이 있다. 책의 앞 부분에서 북유럽의 작은 소녀는 추운 바깥에서 우주를 바라본다. 우주의 차가움을 뚫고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뜨거운 불이 몇 년 전에 내뿜은 빛을 본다. 그리고 책의 후반부에서 남편에게 입을 맞추고 배낭을 메고 나와 자전거를 꺼낸 호프 자런은 따뜻한 열대의 하늘에서 우주를 바라본다. 마찬가지로 차가운 우주 공간을 뚫고 뜨거운 불이 몇 년 전 내뿜은 빛을 본다. 나는 변함없는 우주를 바라보는 그녀를 둘러싼 환경과 관계들, 모든 것이 변했음을 깨닫는다. 책을 읽으며 작은 소녀가 성공한 과학자가 되기까지 작은 변화들이 쌓여 비로소 모든 것이 달라져있었음을 깨닫고 감탄했고 감동을 받았다.

  유시민 작가가 딸에게 이 책을 추천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유시민 작가는 이 책을 읽고 딸에 대한 걱정을 덜어 마음이 놓였다고 한다. 책의 저자는 이주민 가정의 미국인이며 여성 과학자였고 건강상의 큰 어려움을 겪었지만, 깊은 우정과 사랑, 가정을 이루며 살아내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유시민 작가는 이런 조건에서도 이렇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자신의 딸도 잘될 것 같다는 희망을 느꼈기에 추천했던 것이다. '인생은 폭풍우가 지나가길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 빗속에서 춤추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나는 호프 자런의 삶이 그러했다고 생각한다. 유시민 작가님도 이런 관점에서 위로를 받지 않았을까 싶다. 딸에게 추천한 도서이지만 많은 남성들도 읽어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 도서였다.


거기에는 죽음과 같은 우주의 차가움을 뚫고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뜨거운 불이 몇 년 전에 내뿜은 빛이 있었다.
북유럽 가족 구성원들 사이의 멀고도 먼 감정적인 거리는 어려서 형성되기 시작해서 날마다 강화된다. 누구에게도 상대방에 대해 아무것도 물어볼 수 없는 문화에서 자라는 것, 상상해본 적이 있는가?
엄마를 볼 때마다 내 눈앞에 있는 그 세련된 말투의 잘 차려입은 여성이 한때 더럽고 굶주리고 겁에 질린 아이였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엄마의 과거를 드러내는 것은 손뿐이었다. 지금 엄마가 영위하는 라이프스타일과는 어울리지 않는 강인한 손이었다.
1951년 당시 대학은 남성들, 주로 돈이 있는 남성들, 적어도 어느 가정의 베이비시터가 아닌 다른 돈벌이가 있는 남성들을 위한 곳이었다.
몸집은 작지만 결의에 찬 소녀였던 나는 나의 일부만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법을 배우면서도 나의 본질을 배반하지 않기 위한 혼란스럽고 불안정한 길을 걸었다.
바로 내 진정한 잠재력은 내 과거나 현재의 상황보다 투쟁을 마다하지 않는 내 의욕에 있다는 사실 말이다.
각각의 씨앗이 정확히 무엇을 기다리는지는 그 씨앗만이 안다.
눈에 보이는 나무가 한 그루라면 땅속에서 언젠가는 자신의 본모습을 드러내기를 열망하며 기다리는 나무가 100그루 이상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을.
모든 시작은 기다림의 끝이다. 우리는 모두 단 한 번의 기회를 만난다. 우리는 모두 한 사람 한 사람 불가능하면서도 필연적인 존재들이다. 모든 우거진 나무의 시작은 기다림을 포기하지 않은 씨앗이었다.
학교를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가 남자에게 구속되는 삶을 살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으로부터 나 자신을 구하기 위해 일했다. 시골 마을 결혼식을 거쳐 아이들을 낳고, 내 꿈을 펼치지 못한 실망감을 아이들에게 쏟아내면서 아이들의 미움을 받는 운명에서 나를 구하기 위해. 그런 길을 걷는 대신 나는 진정한 성인이 되기 위한 길고도 외로운 여정을 거치기로 결심했다. 약속의 땅은 존재하지 않지만 종착지는 지금 이곳보다는 더 나은 곳일 것이라는 개척자들의 굳은 신념을 가지고 말이다.
이 세상의 이파리들은 단 하나의 임무를 완수하도록 만들어진 같은 종류의 단순한 기계를 수없이 많은 경우의 수로 응용한 것이다.
바로 이날을 위해 일하고 기다려왔다. 이 수수께끼를 해결함으로써 적어도 나 자신에게는 무언가를 증명했고, 마침내 진정한 연구가 어떤 느낌인지 알게 됐다. 그러나 그 큰 만족감에도 그 순간은 인생에서 가장 외로운 순간으로 기억되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내가 좋은 과학자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깨달은 동시에 지금까지 알던 여성들처럼 될 기회를 이제 공식적으로, 완전히 놓쳤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기의 탄생을 기대하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기다렸다(곧 받을 큰 선물에 대한 기대는 크지만 그 과정에는 별 역할을 할 수 없었으니 말이다).
“나무 하나가 타는 걸 다른 놈들한테 보여준 다음 이제 꽃을 피우고 싶은 생각이 좀 드는지 물어볼 수도 있고.”
그것은 새로운 아이디어, 진짜 내 첫 이파리였다. 세상의 모든 대담한 씨앗들처럼 나도 상황이 닥치면 그때그때 거기 맞는 해결책을 찾아가며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이다.
남자 동료들보다 두 배는 더 능동적이고 전략적이어야만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나는 박사학위 3년차부터 교수 자리에 지원했고,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주립 대학인 조지아 공과대학교에서 채용 제의를 받았다.
1년에 한 번씩 가진 것을 모두 버리는 것을 상상할 수 있는가? 몇 주 사이에 모든 것을 다시 쌓아올릴쌓아 올릴 수 있다는 확신이 들기 때문에 그런 행동이 가능한 것이다. 이 용감한 나무들은 자신들이 지닌 모든 속세의 보물들을 땅으로 보내고, 거기서 그 보물들은 곧바로 썩고 분해가 된다. 그들은 어떻게 하면 내년의 보물과 영혼을 하늘에 쌓아 올릴지 모든 성인과 순교자들을 다 합친 것보다 더 잘 알고 있다.
게시판에는 저지대 서식 고릴라들이 자기들의 고향인 아프리카에서 얼마나 곤경에 처해 있는지에 관한 설명이 되어 있었지만, 킹이 플로리다에서 겪고 있는 이런 절대적 속박보다 더 암울한 환경이 콩고에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하기가 힘들었다.
낙엽수는 매년 3월에서 7월까지 짧은 기간 동안 나무 전체를 덮을 새잎을 길러내야 한다. 그해 생산량을 맞추지 못하면 작년에 자신이 차지했던 공간을 경쟁자에게 빼앗길 것이고, 거기서부터 길고도 느린 내리막길이 시작돼서 언젠가 설 곳을 잃고 죽게 된다. 앞으로 10년 후에도 살아 있으려면 올해 성공을 거두지 않으면 안 되고, 다음 해, 그다음 해에도 마찬가지다.
언젠가 과학 분야의 교수를 만나면 연구 결과가 잘못될까 걱정이 되느냐고 물어보라. 연구가 불가능한 문제를 선택했거나 연구 과정에서 중요한 증거를 간과했을까 걱정이 되는지 물어보라. 지금도 여전히 찾고 있는 해답이 가지 않은 여러 길에 있지 않을까 걱정이 되는지 물어보라. 과학 분야의 교수에게 무엇이 가장 걱정인지 물어보라. 길게 걸리지도 않을 것이다. 그녀는 당신을 빤히 바라보면서 한 마디로 답할 것이다. “돈이오.”
덩굴 식물은 숲의 이파리 지붕 맨 위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꽃을 피우거나 열매를 맺지 않는다. 따라서 가장 강한 개체들만 후손을 퍼뜨리고 살아남아왔다.
우리는 잡초의 대담성에 화를 내지는 않는다. 모든 씨앗은 대담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화를 내는 것은 잡초들의 눈부신 성공이다. 인간들은 잡초밖에 살 수 없는 세상을 만들어놓고 잡초가 많이 자란 것을 보면 충격을 받은 척, 화가 나는 척한다.
내 사무실과 종잇장처럼 얇은 벽을 사이에 두고 위치한 휴게실에서 매일 아침 10시에서 10시 30분 사이에 내 성적 취향이나 어릴 때 겪었을지 모르는 트라우마에 관해 벌어지는 토론을 듣게 되는 영광을 누린 결과, 나는 여자 교수들과 과에서 일하는 여성 비서들은 학계의 천적과 같은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30억 년 동안 진행된 진화 과정에서 출현한 생물 중 단 한 종의 생물만이 이 모든 과정을 뒤집어 지구를 훨씬 덜 푸른 곳으로 만들 능력을 지녔다. 도시화는 식물들이 4억 년 전에 고생 끝에 푸르게 만들었던 곳에서 식물의 흔적을 없애고 땅을 다시 딱딱하고 황폐한 곳으로 되돌리고 있다.
내 제한된 경험에 따르면 성차별은 굉장히 단순하다. 지금 네가 절대 진짜 너일 리가 없다는 말을 끊임없이 듣고, 그 경험이 축적되어 나를 짓누르는 무거운 짐이 되는 것이 바로 성차별이다.
“저 사람들 좀 봐. 난 이 일을 앞으로도 30년 넘게 할 것이고, 저 사람들하고 마찬가지로 열심히 할 것이고, 저 사람들만큼 혹은 더 많이 성과를 내겠지만 나를 여기 정당하게 속한 사람으로 인정해줄 사람들은 아무도 없을 거야.”
“애들이 놀렸었어? 학교에서? 네 손을 가지고?” 그 생각을 하니 화가 벌컥 났다. “응.” 빌은 조용히 대답했다. 여전히 하늘을 보고 있었다. 나는 계속 그 이야기에 집착했다. “그래서 그렇게 사는 거야? 그 상처를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거야? 그런 거야? 구덩이 파고 들어가 살고, 친구도 안 사귀고?” “대충 그렇지.” 빌이 인정했다.
실제는 영화보다 더 낫다. 끝나지 않고, 우리가 연기하는 것이 아니며, 나는 화장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나무가 되는 것은 긴 여정이다. 그래서 경험이 굉장히 많은 식물학자라도 나뭇가지나 묘목만을 보고 그 나무가 향후 50년 사이에 어떤 나무로 자라게 될지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 나무의 성장표가 추측하는 데 유용하기는 하지만 그 표는 미래가 아니라 과거만을 보여준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아기는 장난스럽게 엄마, 나 여깄어요 하는 식으로 차는 것이 아니라 구속복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괴롭게 몸부림치듯 배를 찼다.
1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담쟁이덩굴이 무성한 존스홉킨스 대학교에서 여자로서는 처음이자 유일하게 종신 교수직을 받기 직전이던 나는 임신에 동반되는 어떤 육체적 약점도 보이면 안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병원에 가면 간호사들과 테크니션들이 내 체중을 재고, 초음파로 들여다보고 나서 일주일 전보다 내 임신이 일주일 더 진행되었다는 놀라운 소식을 알려준다.
대신 이 아기가 태어남으로써 인생의 일부분이 끝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오랫동안 깊이 슬퍼했다.
잠시 20년 전, 병원에서 이와 비슷한 멸균 바람 앞에서 일하던 어린 여자를 기억해내고 잠시 감상에 빠진다. 고통스러운 시행착오를 거쳐 가며 자신의 미래를 탐색하던 여자 아이.
매년 지구의 땅 위에 떨어진 수백만 개의 씨앗 중 5퍼센트도 안 되는 숫자만이 싹을 틔운다. 그중에서 또 5퍼센트만이 1년을 버틴다. 이런 현실에서 나무에 대한 모든 연구를 시작할 때 무엇보다도 먼저, 가장 중요하게 해내야 하는 일은 어린 나무를 기르는 일이고, 그 일은 실패할 것이 거의 확실한 흉조가 깃든 작업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삼림 연구를 시작할 때 씨앗을 처음 심는 일은 모든 것을 숙명에 맡기는 금욕주의적 연구원이 거두는 고된 승리를 대표한다.
신입 연구원이 자신의 시간에 어떤 식으로든 가치를 부여하는 기미가 있으면 그것은 나쁜 징조다. 그리고 그토록 오랫동안 일한 결과가 순식간에 수포로 돌아가는 것을 목격해야 하는 경험은 이 원칙을 시험하는 좋은 사례다.
큰 좌절에 대처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잠시 멈추고, 숨을 크게 쉰 다음, 마음을 가다듬고 집에 가서 그날 저녁은 다른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낸후 날이 밝으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즉시 그 문제에 다시 몸을 던져 머리를 물속에 집어넣고 바닥까지 다이빙을 해서 그 전날보다 한 시간 더 일하면서 무엇이 잘못됐는지를 찾아내기 위해 애를 쓰는 것이다. 첫 번째 방법이 적절함에 이를 수 있는 길이라면, 두 번째 방법은 중요한 발견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자전거를 꺼낸 다음 따뜻한 열대의 하늘, 끝없이 펼쳐진 차가운 우주 공간을 바라봤다. 거기서 죽음과 같은 우주의 차가움을 뚫고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뜨거운 불이 몇 년 전에 내뿜은 빛을 봤다. 그 빛을 내뿜은 불은 아직도 은하계 저편에서 타오르고 있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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